합평의 시간 46

쓸모없음의 쓸모 / 이규석

쓸모없음의 쓸모 / 이규석 나는 잡초와 전투를 벌이기 위해 주말마다 고향으로 달려간다.봄이 꽃의 계절이라면 여름은 잡초의 계절이다. 이를 증명하려는 듯 대문을 열자마자 기세등등한 잡초들이 안기듯 달려든다. 하지만 텃밭 채소들을 비실거리게 만든 잡초가 여간 밉살스러운게 아니다. 장맛비 잠시 그친 사이, 겉자란 풀밭으로 뛰쳐나가 선무당 칼춤 추듯 낫을 휘두르자 목이 날아가고 허리가 잘린 잡초들이 초록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개선장군처럼 돌아서지만, 잡초들은 금세 되살아나 덤빈다. 이긴 것이 아니었다. 뽑고 또 뽑고, 자르고 또 잘라도 끝없이 살아나는 잡초는 기어이 내 마음조차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망초, 명아주, 엉겅퀴, 질경이, 쇠비름, 쑥부쟁이, 냉이, 억새, 강아지풀, 며느리밑씻개 등 우리의 산과 ..

합평의 시간 2025.05.20

그냥 하고 싶은 것 / 안춘윤

그냥 하고 싶은 것 / 안춘윤 생선 아저씨가 출근했다. 그의 가게는 종로 약국 거리의 버스정류장 옆자리 노점. 몇 개의 좌판을 잇댄 이동식 생선 가게 사장인 그는 열 시경 출근하고 하루도 결근하는 법이 없다. 그와 같이 퇴근하고 출근하는 리어카는 밤새 어디에 있었을까. 풍찬노숙한 더께가 앉아 추레하기 이를 데 없다. 마치 1960년대 어디쯤 기록사진 한 컷에 나올 것 같은 모습으로 늘 그 자리를 지켰다. 좌판 위에서 생선들은 비릿한 냄새를 진하게 풍기며 펑퍼짐하게 앉거나 엎드려 곁눈질로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리다가 생뚱맞은 위치에 누워 있는 생선과 시선이 마주치면 당황했다. 서울 종로 대로변에 생선 좌판이라니. 게다가 덩치 큰 생선은 위압감마저 주었다. 그중 압권은 상어였다. 비록 작..

합평의 시간 2025.05.20

포장마차를 타다 / 심선경

포장마차를 타다 / 심선경분명 이름은 마차인데 포장마차엔 말馬이 없다. 그래서 이 마차는 당신이 원하는 곳까지 달려가지 못한다. 다리가 잘려버린 말 대신, 의족처럼 둥그런 바퀴를 끼워 놓았지만, 그마저도 수술이 잘못되었는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지붕을 덮은 방수 천막은 네 귀를 잡아당겨 못질을 단단히 하고, 아예 멀리 도망가지 못하게 무거운 약수통으로 눌러 꼬리를 바닥에 들러붙게 했다.수시로 포장을 열고 닫으며, 마차에 오르거나 내리는 사람들을 마부는 친절히 맞이하고 또 배웅한다. 가끔은 “나 여소,” 하며 포장을 걷어 올려 승객의 접근성이 용이하도록 마차로 유인할 때도 있다.강철같이 두텁고 육중한 세상의 벽에 여러 번 부딪쳐 본 이들은 안다. 세상은 그 어느 것 하나 호락호락한 것이 없다는 것을. ..

합평의 시간 2025.05.20

토마토 파르티잔 / 원도이

토마토 파르티잔 / 원도이 벽을 쌓읍시다 아니, 벽을 삶읍시다 토마토처럼벽도 빨갛게 익어갑니다 잘 누르면 으깨지기도 합니다 벽을 말랑말랑하게 가꾸는 일입니다 잘 삶은 벽을 접시에 담아 식탁에 놓고 마주 앉아오물오물 씹는 시간을 다정한 저녁 식사라고 해봅시다토마토처럼 흐물흐물해진 벽 앞에서우리는 잠시 입을 맞춥니다 입속에서도 토마토는 자랍니다줄기는 벽을 타고 오를까요 우리는 잠시 채소이거나 과일이거나 상관없습니다 벽은 토마토를 알지 못합니다토마토의 심장에 씨앗이 들어 있다는 걸 씨앗은아주 작고 보드랍다는 걸씨앗도 붉다는 걸 벽과 토마토의 거리는 유동적입니다어느 오후 나뭇잎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의 기분에 따라 흘러 다닙니다 빗물이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기분과 토마토에서 둥글게 떨어져 내리는 기분은 다를까요 ..

합평의 시간 2025.04.22

남쪽의 집수리 / 최선​

남쪽의 집수리 / 최선​ 전화로 통화하는 내내 꽃 핀 산수유 가지가 지지직거렸다. 그때 산수유나무에는 기간을 나가는 세입자가 있다. 얼어있던 날씨의 아랫목을 찾아다니는 삼월, 나비와 귀뚜라미를 놓고 망설인다. 봄날의 아랫목은 두 폭의 날개가 있고 가을날의 아랫목은 두 개의 안테나와 청기聽器가 있다. 뱀을 방안에 까는 것은 어떠냐고 수리업자는 나뭇가지를 들추고 물어왔지만 갈라진 한여름 꿈은 꾸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 오고 가는 말들에 시차가 있다. 그 사이 표준 온도차는 5도쯤 북상해 있다 천둥과 번개 사이의 간극, 스며든 빗물과 곰팡이의 벽화가 문짝을 7도쯤 비틀어지게 한다. 북상하는 꽃소식으로 견적서를 쓰고 문 열려있는 기간으로 송금을 하기로 한다. 꽃들의 시차가 매실 속으로 이를 악물고 든다..

합평의 시간 2025.04.22

천변 아이 / 박준

천변 아이 / 박준 게들은 내장부터 차가워진다 마을에서는 잡은 게를 바로 먹지 않고맑은 물에 가둬 먹이를 주어 가며닷새며 열흘을 더 길러 살을 불린다 아이는 심부름 길에 몰래게를 꺼내 강물에 풀어준다 찬 배를 부여잡고화장실에 가는 한밤에도 낮에 마주친 게들이 떠올라한두 마리 더 집어 들고 강으로 간다. 슬프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 속의 아이와 겹쳐지는 내 어린 시절 추억은 없다. 월사금을 내지 못한 아이들을 선생은 집으로 돌려보냈고 집에 가봐야 돈 나올 구멍이 없는 것을 훤히 아는 아이는 천변에 쭈그리고 앉아 나뭇잎 배를 접었다. 나뭇잎 배 위에 개미 몇 마리를 태워 보내며 좋은 곳으로 가렴, 중얼거렸다. 천변에 국극단이 들어온 날이면 이수일과 심순애를 보고 늦은 오후 빈 교실로 가 가방을 들고 집으로 ..

합평의 시간 2025.04.22

수풀떠들썩팔랑나비의 작명가에게 / 손택수

수풀떠들썩팔랑나비의 작명가에게 / 손택수 수풀도 좀 점잖고 싶을 때 있지나비도 날개를 접고 곤히쉬고 싶을 때 있지마냥 떠들썩 팔랑거려야 하니 얼마나 고역인가하긴, 나도 내 이름이 싫을 때가 있으니까집 없는 이름 한가운데 왜 집을 가졌는지그래도 집 택 자 덕분에시집이라도 몇 채 갖고 있는 건 아닌지수풀떠들썩팔랑,나비 이름을 부르면잠자리채를 들고 곤충채집을 가던 소년이 보인다면바지에 묻은 풀물처럼 잘 지워지질 않는 여름나는 여전히 발뒤꿈치를 들고 있다잡았다 싶은 순간,나비는 늘 저만치 멀어진다그때 내가 잡고 싶었던 건 나비가 아니라더 가까워질 수도 멀어질 수도 없는저물도록 떠들썩 팔랑거리던 그 환한 거리가 아니었을까이름 속에 들어올 수 없는 떨림을 알아서앉은 나비를 품고 두근거리는 수풀과아닌 척 거리를 좁히..

합평의 시간 2025.04.22

일광욕하는 가구 / 최영철

일광욕하는 가구 / 최영철 지난 홍수에 젖은 세간들이골목 양지에 앉아 햇살을 쬐고 있다그러지 않았으면 햇볕 볼 일 한 번도 없었을늙은 몸뚱이들이 쭈글쭈글해진 배를 말리고 있다긁히고 눅눅해진 피부등이 굽은 문짝 사이로 구멍 뚫린 퇴행성 관절이삐걱거리며 엎드린다그 사이 당신도 많이 상했군진한 햇살 쪽으로 서로 몸을 디밀다가몰라보게 야윈 어깨를 알아보고 알은체한다살 델라 조심해, 몸을 뒤집어주며작년만 해도 팽팽하던 의자의 발목이 절뚝거린다풀죽고 곰팡이 슨 허접쓰레기,버리기도 힘들었던 가난들이아랫도리 털 때마다 먼지로 풀풀 달아난다여기까지 오게 한 음지의 근육들탈탈 털어 말린 얼굴들이 햇살에 쨍쨍해진다 「일광욕하는 가구」는 재해의 상처를 입은 가구들을 통해, 인간의 삶, 노쇠, 가난, 회복을 은유적으로 그려낸..

합평의 시간 2025.04.22

수평의 힘 / 안정숙

수평의 힘 / 안정숙 풍경을 펼쳐놓고안쪽과 바깥쪽을 짐작하면밀거나 당기는 힘이 미래가 된다 허리에 공구 벨트 맨 그가 사다리에 올라서면새로 들어설 커피숍이거미줄같이 가상의 선으로 연결된다창문 너머까지 이어지는 빛처럼 내부를 위해 바깥을 세워 가는 동안바깥이 내부의 마음을 쉼 없이 기웃거린다 서녘의 공중에 타카를 박는다 탁탁 어스름 속에서 낯선 별이 되고그것이 모여 별자리를 만들고벽은 나무의 온화한 질감을 닮아간다 눈금이 벽면 둘레를 수정할 때그는 이미 마감재 작업이 진행 중인데 선풍기 회전 방향 따라 흩어지는 잡념들 집기들이 배치될 공간에 수직의 꿈을 잰다 지친다는 말을 하면 비스듬해진다 가끔 사다리가 휘청거릴 때는 몇 톤의 업을 두른 것처럼 몸이 뻣뻣하다어깨는 자투리만 한 내일의 각도를 재고생활은 어..

합평의 시간 2025.04.22

진공 청소기/ 서안나

진공 청소기/ 서안나 내 배는 항상 불러 있어요. 하지만 늘 배가 고파요. 눈에 보이는 건 모두 들이마시고 싶군요. 먼지가 가득 차면 주인은 내 배를 열고 더러워진 세상을 끄집어내죠. 내 뱃속엔 세상을 걸러내는 필터가 달려 있죠. 필터에는 단추, 하늘, 터진 신발, 개진 기왓장, 언덕, 노을, 정원이 딸린 계단, 풀밭을 뛰어다니는 소녀가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며 걸려 있기도 하거든요. 나는 그것을 내뱉고 한껏 가벼워진 몸으로 다시 세상을 들이마시지요. 어쩔 땐 티브이도 집어삼키고 집도 한 채 먹어치우죠. 오늘 아침엔 소녀가 풀밭을 머리에 이고 내 뱃속을 붕붕 날아다니네요. 소녀를 위해 화장품과 비둘기 몇 마리도 먹어야 할까 봐요. 주인이 다시 내 몸을 열고 있어요. 서안나의 **「진공 청소기」**는 우리가 ..

합평의 시간 2025.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