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평의 시간

쓸모없음의 쓸모 / 이규석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5. 5. 20. 12:50

쓸모없음의 쓸모 / 이규석

 

나는 잡초와 전투를 벌이기 위해 주말마다 고향으로 달려간다.

봄이 꽃의 계절이라면 여름은 잡초의 계절이다. 이를 증명하려는 듯 대문을 열자마자 기세등등한 잡초들이 안기듯 달려든다. 하지만 텃밭 채소들을 비실거리게 만든 잡초가 여간 밉살스러운게 아니다. 장맛비 잠시 그친 사이, 겉자란 풀밭으로 뛰쳐나가 선무당 칼춤 추듯 낫을 휘두르자 목이 날아가고 허리가 잘린 잡초들이 초록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개선장군처럼 돌아서지만, 잡초들은 금세 되살아나 덤빈다. 이긴 것이 아니었다. 뽑고 또 뽑고, 자르고 또 잘라도 끝없이 살아나는 잡초는 기어이 내 마음조차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망초, 명아주, 엉겅퀴, 질경이, 쇠비름, 쑥부쟁이, 냉이, 억새, 강아지풀, 며느리밑씻개 등 우리의 산과 들, 논밭에는 저절로 나서 자라는 풀이 칠백 종이 넘는단다. 그러나 잡초라는 이름의 풀은 없었다. 사진을 뒤졌더니, 대수롭지 않은 풀이라서 잡초라고 부른다고 했다. 감자밭에 난 배추도 잡초라고 괄시당하는 판에 어찌 제 이름이 호명되기를 바라랴. 잡초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수록 역적 귀양 보내지듯 텃밭에서 멀리 내쫓기고 만다. 넝쿨로 뻗어가면서 나무의 숨통을 조이는 고약한 환산 덩굴이야 미움을 받아도 어쩔 수 없지만, 일찍 봄을 알려주기 위해 맨몸으로 겨울을 견딘 냉이는 마땅히 위로를 받아야 한다. 꽃보다 더 아름다운 꽃으로 벌 나비를 부르는 개망초나 귀엽고 깜찍한 애기똥풀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비록 하찮은 풀이라도 나름대로 사명이 있고 저마다 개성 넘치는 이름을 가졌음에도 무심한 사람들은 그냥 잡초라고 하대한다. 어느 시인은 ‘내 이름 모른다고 / 잡초, 잡초라고 하지마라 // 내가 당신 이름 모른다고 / 잡 것이라 하더냐*'라고 절규했다.

그리 무시당하고 홀대받으면서도 잡초들은 마른 땅 젖은 땅 가리지 않고 잘도 자란다. 도대체 누가 잡초의 씨앗을 이리도 야무지게 뿌려대며 어떻게 돌보았기에 저리도 씩씩하게 자랄까 싶다. 질기지 않으면 잡초가 될 수 없었던지. 바랭이는 대표 잡초답게 마디마다 뿌리를 내려가며 오체 투지하듯 전진한다. 사방으로 퍼지다가 장애를 만나면 뜨거운 너럭바위도 타고 오른다. 뭇사람의 발걸음에 밟히고 수레바퀴에 깔려 시퍼렇게 멍이 든 질경이는 다른 풀들과의 경쟁이 싫어 아예 길바닥에 나와 산다고 했다. 배고픈 시절에 구황식품 노릇을 톡톡히 해왔던 쇠비름은 뿌리 채 뽑혀 열흘 뙤약볕 아래 내던져졌다가도 소낙비 한줄기에 되살아날 만큼 끈질기다. 내가 그들 근성의 반의 반만이라도 지녔더라면 우리 집 텃밭은 이미 낙원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옛날, 어떤 사람이 채소에 물을 주고 있는 농부에게 “왜 채소는 정성껏 보살피는데도 시들하고 잡초는 돌보지 않아도 왕성하게 잘 자라는가?”라고 물었더니, “대지의 여신에게 잡초는 친자식이고, 사람이 심은 채소는 의붓자식이기 때문이지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이솝우화에서 나온 이야기다. 그래서 부모 잘 만난 잡초는 떵떵거리며 살아가는가 보다. 하지만 햇볕과 물, 바람이 어찌 식물에만 부모 노릇을 하였을까 싶다.

나만 잘났다고 거들먹거릴 일이 못된다. 아무리 재주가 뛰어난 사람도 제 혼자의 힘으로는 쌀 한 톨 만들 수 없고, 대추 한 알도 붉게 익힐 수가 없다. 그런데도 햇볕은 잘난 사람에게도 못난 사람에게도 축복처럼 쏟아지고, 비는 선한 사람의 논에도 악한 사람의 논에도 똑같이 단비로 내린다. 모든 생명체가 싱싱하게 살아가라고 때맞춰 들판에는 바람까지 실렁실렁 불어댄다. 얼마나 너그러운 하늘인가. 그런데 나는 내 안의 악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잡초를 뿌리 뽑지 못해서 안달일까? 욕하면서 배운다더니, 어쩌면 초지일관 제 뜻대로 살아가는 그들이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산불이 난 산은 언제까지나 민둥산이 아니었다. 불난 자리에는 항상 잡초들이 먼저 자리를 잡는다. 이어서 관목, 교목 순으로 나무들이 들어서고 해를 거듭하며 산은 다시 숲을 이룬다. 실처럼 가는 뿌리로 지구를 움켜쥔 잡초가 토양의 유실을 막아가면서 땅을 비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체 무엇이 유용하고 무엇이 무용한 것인가? 민들레는 꽃만 고와서 살아남은 게 아닐 것이다. 가시투성이인 엉겅퀴는 여린 순은 나물로 내주고 뿌리는 지혈 작용이 좋아 한약재로 귀히 쓰인다. 청려장이라는 명품 지팡이는 흔해 빠진 잡초, 명아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유익하지 않은 잡초가 없다.

정신없이 풀을 뽑다가 얄궂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누군가가 세상의 풀을 모조리 뽑아버린다면 지구는 어떻게 될까? 폭염으로 지구는 양철지붕처럼 뜨거워질 테고, 수온이 높아진 바다는 허구한 날 크고 작은 태풍을 몰고 다닐 것이다. 이상고온으로 이미 지구 한쪽에선 대형 산불이 이어지고 있다. 반대쪽에선 폭우가 그치지 않아 도시를 물바다로 만든다. 바이러스의 창궐로 코로나 같은 괴질이 이어질까 두렵고, 지구온난화 때문에 벌이 사라지면 과일도 함께 사라질 텐데 그러면 무슨 맛으로 세상을 살아야 할까. 간 큰 가해자였다가 어느새 대책없는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TV에서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는 장면을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거린다. 인간의 탐욕과 오만은 어디까지 일까. 더 큰 재앙이 닥치기 전에 《조화로운 삶》을 산 니어링 부부처럼 숲으로 들어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도 이젠 그만 다투고 풀과 함께 더불어 살기로 했다. 텃밭에는 자갈밭에서도 잘 산자는 메밀 씨앗을 뿌렸다. 열흘이 지나서야 연둣빛 여린 싹들이 힘겹게 고개를 내밀었지만, 포기마다 핀 꽃들이 봉평의 메밀밭처럼 온 밭을 하얗게 뒤덮었다.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잡초만큼 번식력이 강하다는 맥문동은 담장을 따라 심었다. 여름마다 아름드리 왕버들 아래 보랏빛 꽃바다를 이루는 성주의 ‘성밖숲’처럼 우리 집에도 담장 따라 꽃 물결이 일렁이기를 바라며 부지런히 호미질했다. 봄나물 중 맛으로서 으뜸인 취나물도 꾹꾹 눌러 심었다. 한해만 지나도 배 이상 번진다는데 어떻게 제초제를 뿌려댈 것인가. 더 굳세게 자라라고 비 오기 전날엔 퇴비를 듬뿍 뿌려주었다.

멀리서 바라본 초록은 평화였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본 초록은 전쟁이었다. 잡초는 비록 거칠게 살지만, 짐승들에게는 먹이가 되고 벌레들에게는 보금자리가 되어준다. 그들에게 나는 언제 한 번이라도 유익하였던가. 이제부터라도 지구를 꽉 잡고 있는 잡초에서 쓸모없음의 쓸모를 배워야겠다.

 

이규석의 수필 「쓸모없음의 쓸모」는 잡초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성찰을 담은 글입니다. 다음은 이 작품의 핵심 내용을 요약하고, 그 의미를 정리한 것입니다.


📌 주요 내용 요약

  1. 잡초와의 전쟁
    • 저자는 매주 고향에 내려가 잡초와 싸우지만, 잡초는 잘라내도 금세 자라나며 그의 마음마저 어지럽힌다.
  2. 잡초의 이름과 존재감
    • 이름도 없이 ‘잡초’라 불리는 풀들. 사실은 각각 망초, 냉이, 쇠비름 등 개별 이름과 쓰임이 있는 생명들이다.
    • 시인의 시를 인용하며 ‘잡초’라는 호칭에 대한 사회적 무심함과 편견을 비판한다.
  3. 잡초의 생명력과 근성
    • 바랭이, 질경이, 쇠비름 등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생존하는 강한 생명력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4. 대지와 인간의 차이
    • 채소는 ‘의붓자식’, 잡초는 ‘친자식’이라는 이솝우화의 비유를 통해 인간 중심적 시선을 반성한다.
    • 자연은 특정 생명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공평하다.
  5. 생명의 유용성과 상호성
    • 엉겅퀴, 명아주, 민들레처럼 잡초라 불리는 것들도 실제로는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는 존재다.
    • 인간이 무심히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것의 숨은 가치를 조명한다.
  6. 지구와 공존의 메시지
    • 잡초를 뽑아 없애는 인간의 행동이 환경 파괴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
    • 이상 기후, 바이러스, 생태계 파괴는 인간의 오만함이 낳은 결과일 수 있음을 성찰한다.
  7. 잡초와 더불어 살기
    • 저자는 잡초와의 전쟁을 멈추고 공존을 선택한다. 메밀, 맥문동, 취나물 등을 심으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 한다.

🌱 주제와 메시지

  • ‘쓸모없음’으로 치부된 것들의 쓸모를 재조명하며, 보이지 않는 가치를 인식하자는 생태적,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 인간 중심적 시선을 넘어 자연과의 공존, 겸허함, 생명에 대한 존중을 이야기한다.
  • 또한, 사회적으로도 무시당하고 배제되는 존재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포용의 메시지를 전한다.

🧠 생각거리

  • 나는 내 주변의 ‘잡초’ 같은 존재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 ‘쓸모없다’고 판단해왔던 것들 속에서 어떤 숨은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까?
  • 자연을 다스리는 주인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세는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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