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3658

그대와 사랑을 하고 있어요 / 이채

그대와 사랑을 하고 있어요 / 이채그대를 그리워한다는 것기다린다는 것그것만으로도행복을 느끼는 것이 사랑이라면 난 지금 그대와 보석같은 사랑을 하고 있어요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이 사랑이라면 이 순간 난 그대와 장밋빛 빨간 사랑을 하고 있어요남녀가 아닌사람과 사람 사이의 시간과 공간에서 흐르는 향기와 믿음그대와 나의 만남이지극히 인간적일 때그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면난 지금 그대와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어요출처 이채 제3시집 중에서

글쓰기 공부방 2025.05.28

봄날 한채 / 노향림

봄날 한채 / 노향림 저녁노을 속을 누가 혼자 걸어간다높은 빌딩 유리창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며거대한 낙타처럼터덜터덜 걸어내려간다강변 둔치까지는구름표범나비 등을 타고 넘어갈까황사바람 누런 목덜미를 타고 넘어갈까잠시 머뭇거린다타클라마칸 혹은 고비가 내 마음 안에도 펼쳐 있고모래 위에 환한 유칼리나무잠시 피었다가 지워진 아치형 길이 홀로 뚫려 있다시끄러운 세상은 돌아보지 마라매정하게 채찍 휘두르며 낙타 등에 올라그 길을 느리게 아주 느리게 누가 혼자 넘어간다봄날 한채가 아득히 저문다 [노향림 '푸른 편지' 창비 2019]

글쓰기 공부방 2025.05.28

시간 이탈자 / 홍순화

시간 이탈자 / 홍순화남자의 고독사를 알린 건 바람이었다마주 보고 살면서도 모르쇠로 일관했던무관심이 부른 부패는 한 달이나 진행되었다그의 곁엔벽시계 하나만 걸려 있을 뿐화려했던 전생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매일 되풀이되던 일상이 사라진 남자입버릇처럼 달고 살던 시간 없다란 말이 사라지자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었다사각의 침대 사각의 이불사각형 냉장고 사각의 그릇에 담긴 음식사각의 세탁기에서 꺼내 입던 옷그의 주변은 온통 모가 난 불평만 있고굴러가지 못하고 모서리에 늘 혼자였다주식이 알코올로 바뀐 건 언제였을까둥근 컵에 따라 마시던모난 세상은 빙글 돌아 그의 편이 되어 주었을까과거가 된 모난 사내가 주소지를 옮기고 있다-홍순화화려하지 않았지만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생애였을 것이다. 시계추처럼 되풀이..

글쓰기 공부방 2025.05.28

늘 그리운 그대 / 이채

늘 그리운 그대 / 이채 풍선처럼 터질 듯한 꽃잎은아침 햇살로 피어나고숨소리까지 젖어드는 별빛은까만 밤 눈물 속에 흐르네늘 그리운 그대는잠이 든 창문을 깨우는데마음은 붉은 노을이 되어가도 가도 서쪽으로 기우네늘 그리운 그대는별빛으로 출렁이는데마음은 타버린 숯처럼숯처럼 검기만 하네늘 그리운 그대여!저 하늘 별처럼 멀기만 해도그저 바라볼 수 있음에이 밤 외롭지 않네출처 이채 제3시집 중에서

글쓰기 공부방 2025.05.26

사랑의 순서 / 신미나

사랑의 순서 / 신미나 나는 오리라 하였고 당신은 거위라 하였습니다모양은 같은데 짝이 안 맞는 양말처럼당신은 엇비슷하게 걸어갑니다나는 공복이라 하였고 당신은 기근이라 하였습니다당신은 성북동이라 하였고 나는 종암동이라 하였습니다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 일치합니다 노인들이 바둑 두는 호숫가에 다시 와 생각합니다흰 머리카락을 고르듯 무심히 당신을 뽑아냅니다은행알을 으깨며 우모차가 지나갑니다눈물 없이 우는 기분입니다괜찮습니다, 아직은 괜찮아요 은행잎도 초록인걸요떼로 몰려드는 잉어의 벌린 입을 보세요씨 없는 가시덩굴이 기어이 벽을 타고 오릅니다 [신미나 '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창비 2021]

글쓰기 공부방 2025.05.26

봄날 / 박미경

봄날 / 박미경 내 알았어알았으니 그대여꽃처럼 피어나라피어나 스러진 저 갈빛몸 놓아 망연한 갈대무성한 푸른 새싹이거나, 그깊숙한 곳 조잘거리는새 떼거나 했으면어제 잠시 맡았던 숨 가쁜아카시아 향기나 했으면.(시집 ‘그리고 나마스떼’, 푸른 길, 2017)[시의 눈]상대를 향한 존경과 경의, 나마스떼, 히말라야를 다녀온 시인에게서 흥건히 젖은 오월의 향내를 맡는다. 스러진 갈빛의 망연한 갈대를 후경화하고, 무성한 새싹, 조잘거리는 새 떼를 지배소로 전경화했다. 이 대립적 대응, 그 경계를 통해 꽃처럼 피어나는 오월의 생기가 오관을 타고 흘러드는 것을. 역시 봄의 미토스는 재생과 부활, 어둠과 소멸을 물리치고 활기와 소망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봄날은 감사와 겸손의 은유로 조용히 스며든다. ‘내 알았어/ 알..

글쓰기 공부방 2025.05.26

나 자신을 기리는 노래 / 김소연

나 자신을 기리는 노래 / 김소연입술을 조금만 쓰면서내 이름을 부르고 나니오른손 바닥이 심장에 얹히고나는 조용해진다좁은 목구멍을 통과하려는물줄기의 광폭함에 가슴이 뻐근할 뿐이다슬프거나 노여울 때에눈물로 나를 세례(洗禮)하곤 했다자동우산을 펼쳐든 의연한 사내 하나가내 처마 밑에 서 있곤 했다이제는이유가 없을 때에야 눈물이 흐른다설거지통 앞하얀 타일 위에다밥그릇에 고인 물을 찍어시(詩) 한 줄을 적어본다네모진 타일 속에는그 어떤 암초(暗礁)에도 닿지 않고 먼 길을 항해하다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그의 방주(方舟)가 있다눈물로 바다를 이루어누군가가 방주를 띄울 수 있도록 하는 자에게는복이 있나니,혼자서 노래를 부르며 우는 자에게는복(福)이 있나니,복이 있나니평생토록 새겨왔던 비문(碑文)에습한 심장(心臟)을 대고..

글쓰기 공부방 2025.05.26

정상과 우물 / 정진규

정상과 우물 / 정진규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지금 대낮인 사람들은별들이 보이지 않는다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별들이 보인다지금 어둠인 사람들만별들을 낳을 수 있다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정진규 '별' 전문대낮은 별을 삼키고 어둠은 별을 쪼아낸다. 그러므로 어둠만이 별의 존재 양식이다. 빛을 비워내야 어둠이 오고 어둠이 깊어져야 별이 오지 않던가.대낮의 정상 대신 깊은 우물을 바라봐야 비로소 몸을 드러내는 별 하나. 그 먼 곳의 별 하나를 가슴에 품기 위하여, 가득 찬 곳보다는 텅빈 곳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별은 지금도 태어난다. 어둠을 사랑하는 자들은 별을 낳고, 그 자신 스스로 별이 된다.[매일경제 신문 김유태 문화스포츠부 기자(시인)]

글쓰기 공부방 2025.05.26

전설 바다의 밤물결 / 장이지

전설 바다의 밤물결 / 장이지 골목이 어제보다 어둡다 그것은 골목 초입의 빨래방이 어제보다 어두운 탓이다 빨래방이 어제보다 어두운 것은 한 사람이 빨래방에 있어서다 그 사람의 앉은키만큼 노란빛이 사라져서다 통유리창 너머로 그 사람의 등을 오래 쳐다본다 그 사람의 등으로 가서 등의 중심으로 가서 나는 백열등을 하나 켤 수도 있으리라 백열등 아래 어항으로 들어갈 수도 있으리라 거기서 인두겁을 벗고 부드러운 비늘을 드러낼 수도 있으리라 나는 밤물결을 누비는 인어가 된다 목소리를 잃는 대신 한 사람이 된다 그 사람이다 빨래방에 앉아 있다 그러한 과거를 떠올리면서 장이지(1976~) 시인은 지금 골목 초입 빨래방에 서 있다. 빨래방은 오늘 어둡다. “빨래방이 어두운 것은” 한 사람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시인..

글쓰기 공부방 2025.05.26

달에 간 손 / 장철문

달에 간 손 / 장철문 달이 베란다 가까이 와서 창 안쪽을 기웃거렸다할매가 하늘에 떠 있느라고 애쓴다고 쓰다듬어 주었다나는 매일 지구를 도느라고 애쓴다고 쓰다듬어 주었다나한테 달까지 뻗을 손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장철문(1966~) 달이 밤하늘에 떠서 환한 달빛이 내려온다. 그 빛은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달빛은 달맞이꽃에게, 골목과 빈 마당에, 나무와 신록의 숲에, 상점과 아파트에 내린다. 달빛은 ‘나’의 집 베란다에도 이르렀다. 창문을 통과한 은은한 달빛은 ‘나’의 방 안쪽까지 들어왔을 것이다. 평소에도 말이 없이 방 안쪽까지 깊숙이 들어와 책상과 이불과 ‘나’의 얼굴과 꿈을 포근하게 살며시 덮었을 것이다. 오늘은 달을 보며 할머니가 달을 쓰다듬으신다. 바닥에 눕거나 앉지를 않고 저처럼 서서, 공중..

글쓰기 공부방 2025.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