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평의 시간 46

< 어떤 광합성 > 김영곤

어떤 광합성 > 김영곤 2025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병실에 누워있다, 깡마른 나무 한 그루한뉘 내내 둥근 세상 사각 틀로 깎아내다제 몸을 보굿*에 끼워몸틀처럼 앙버티는, 무엇을 기다릴까, 천 개의 귀를 열고한 번도 부화하지 않은 톱밥의 언어들이끝내는 해독 못한 채침묵 속에 갇히고, 저 왔어요 한 줌의 말 광합성이 되는 걸까핏기 잃은 가지에서 붉은피톨 감돌 때고집 센 심장박동기뿌리째 팽팽해지는, 무척산에 옮겨 심은 우듬지 저류에서썩지 않는 후회가 시간의 뺨 데우며절단된 둘째손가락단풍 빛깔로 손 흔드는, *보굿:나무껍질의 순우리말. 「어떤 광합성」(김영곤, 2025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분석이 시조는 **병실에 누워 있는 ‘깡마른 나무 한 그루’**라는 상징적인 이미지를 통해👉 삶과 ..

합평의 시간 2025.03.11

< 카카리키 앵무 > 이주경

카카리키 앵무 > 이주경 2025 전북일보신춘문예 시 당선작 ​ 조용히 우는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주전자 물 끓는 소리보다 작게 울어도 가둔다 미풍에 머리카락 날리는 소리보다 작게 울어도 가둔다 창문보다 낮게 목소리를 죽이는 아이, 이웃집엔 중문도 방음벽도 없단다 얌전히 울면 해바라기 씨를 가득 줄 테야   호기심 많은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탁자 위에 놓인 꽃병을 쪼아대도 가둔다 짧고 단단한 부리로 백합 꽃잎을 쪼아대도 가둔다 동글동글한 눈빛으로 수도꼭지를 툭툭 건드려도 가둔다 집안에서 제일 예민한 각도로 웅크리는 아이, 이웃집엔 꽃병도 수도꼭지도 없단다 너의 호기심을 잠그면 해바라기 밭을 줄 테야  혼자 놀기 좋아하는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오후 햇살이 올리브색 깃털 위로 미끄러져도 가둔다 건반 위를 ..

합평의 시간 2025.03.11

< 아오키가하라* > 이지우

아오키가하라* > 이지우 2025 광남일보 신춘 문예 시 당선작 외로움이란 자꾸 발견되는 이상기후나는 지금부터 나를 고백하는 것으로숲에 도달할 수 있다 여름이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어떤 날, 나는 스스로를 바꿔 보기로 했다 노력과 사랑을 뒤섞어서밥과 함께 삼켜 보기로 했다 문장 속으로 회피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새벽을 참 좋아하고이것은 글로 포기할 마음을 먹는다는 것 창 너머로는 고장난 실외기가 소음 없이 돌아간다다리 사이로 차오르는 땀과 찝찝함이 아름다워지는 순간이내게는 있다 사람이 너무 좋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미안한 마음이 지속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녹아버린 빙하처럼외로움은 누군가가 주목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중요해지는 것이다 나는 선풍기로 외로운, 혼자인, 함께는 불가능한 스스로를 ..

합평의 시간 2025.03.11

< 사력 > / 장희수

사력 > / 장희수 2025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할머니가 없는할머니 집에선 손에서 놓친 휴지가 바닥에 돌돌 굴렀다 무언가 멀어져가는 모습은이렇게 생겼다는 듯 소금밭처럼 하얗게 펼쳐지고 어떤 마음은 짠 맛을 욱여가며 삼키는 일 같았다 그 중 가장 영양가 없는 것은포기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라 생각해본 적 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포기할 수 있었다면 또다시 포기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생길 리 없을 테니까 할머니도 이제야 뭔들관두는 법을 배운 거겠지 다 풀린 휴지를 주섬주섬 되감아보면 휴지 한 칸도 아껴쓰라던 목소리가,귓등에서 자꾸만 쏟아지는 것 같았는데 쏟아지면 쏟아지는 것들을 줍느라자주 허리가 굽던 사람의 말은 더 돌아오지 않는 거지죽을 힘을 다해본다 해도 사람들은영정 앞으로 다가와국화꽃을 떨..

합평의 시간 2025.03.11

<작은 부엌 노래> / 문정희

작은 부엌 노래> / 문정희 부엌에서는언제나 술 괴는 냄새가 나요한 여자의 젊음이 삭아 가는 냄새한 여자의 설움이찌개를 끓이고한 여자의 애모가간을 맞추는 냄새부엌에서는언제나 바삭바삭 무언가타는 소리가 나요세상이 열린 이래똑같은 하늘 아래 선 두 사람 중에한 사람은 큰방에서 큰소리치고한 사람은종신 동침 계약자, 외눈박이 하녀로부엌에 서서뜨거운 촛농을 제 발등에 붓는 소리부엌에서는 한 여자의 피가 삭은빙초산 냄새가 나요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모르겠어요촛불과 같이나를 태워 너를 밝히는저 천형의 덜미를 푸는소름 끼치는 마고 할멈의 도마 소리가똑똑히 들려요수줍은 새악시가 홀로허물 벗는 소리가 들려와요우리 부엌에서는...... 문정희의 **「작은 부엌 노래」**는 부엌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여성이 겪는 희생과 억압, ..

합평의 시간 2025.03.11

< 빙하기의 역 > 허수경

빙하기의 역 >  허수경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얼어붙은 채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내 속이 할머니가 물었다, 어디에 있었어?내 속의 아무머니가 물었다, 무심하게 살지 그랬니?내 속의 아가씨가 물었다, 연애를 세기말처럼 하기도 했어?내 속의 계집애가 물었다, 파꽃처럼 아린 나비를 보러 시베리아로 간 적도 있었니?내 속의 고아가 물었다, 어디 슬펐어? 그는 답했다, 노래하던 것들이 떠났어그것들, 철새였거든 그 노래가 철새였거든그러자 심장이 아팠어 한밤중에 쓰러졌고하하하, 붉은 십자가를 가진 차 한 대가 왔어소년처럼 갈 곳이 없어서병원 뜰앞에 앉아 낡은 뼈를 핥던개의 고요한 눈을 바라보았어 간호사는 천진하게 말했지병원이 있던 자리에는 죽은 사람보다 죽어가는 사람의 손을 붙들고 있었던 손들..

합평의 시간 2025.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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