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평의 시간 46

그리움 / 이용악

그리움 / 이용악(李庸岳1914 - 1971) 눈이 오는가 북쪽엔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백무선 철길 위에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너를 남기고 온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어쩌자고 잠을 깨어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이용악의 시 〈그리움〉은 그가 지닌 북향의 정서—즉, 분단 이후 고향을 그리는 이산의 정서—를 절절하게 담아낸 작품입니다.읽는 내내 마음속 어딘가가 서늘하게 시리고, 또 뜨겁게 저며오는 그런 시예요.시 감상과 해석1. “눈이 오는가 북쪽엔 /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시는 되풀이되는 의문으로 시작하고 끝나요. 이 반복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확인할 수 없는 ..

합평의 시간 2025.04.08

눈 내리는 거리에서 / 이용악

눈 내리는 거리에서 / 이용악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고오히려 빛나는 밤을 헤치고 내가 거니는 길은 어느 곳에 이를지라도 뱃머리에 부딪쳐 둘로 갈라지는 파도 소리요 나의 귓속을 지켜 길이 사라지지 않는 것 만세요 만세소리요 단 한 번 정의의 나래를 펴기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 참아 왔습니까 이젠 오랜 치욕과 사슬은 끊어지고잠들었던 우리의 바다가 등을 일으켜동양의 창문에 참다운 새벽이 동트는 것이요승리요 적을 향해 다만 앞을 향해 아세아의 아들들이 뭉쳐서 나아가는 곳 승리의 길이 있을 뿐이오 머리 위 어깨 위 내려 내려서 쌓이는 하아얀 눈을 차라리 털지도 않고 호올로 받들기엔 너무나 무거운 감격을 나누기 위하여 누구의 손일지라도 나는 정을 다하여 굳게 쥐고 싶습니다 이용악의 「눈 내리는 거리에서」는 격..

합평의 시간 2025.04.08

구멍조끼 /이경록

구멍조끼 /이경록 검정 고무신 꺾어 자동차 놀이 할 때, 각자 싣는 게 달랐다. 명근이는 텃밭 흙을, 용욱이는 마른 모래 한 고봉을, 정두는 나사와 부러진 망치 대가리를, 나는 풀꽃을 꺾어 넣고 언덕길을 달렸다. 정두는 공대를 나와 자동차 회사에 나가고, 명근이는 경운기 탕탕거리며 소를 키운다. 용욱이는 막다른 골목까지 배달 도시락을 나르고, 나는 풀벌레 소리며 눈물 그렁그렁한 시를 꿈꾼다. 이럴 줄 알았다면 할머니 금반지며 삼촌 주판알을 가득 채우고 부룽거릴걸. 하지만 흙탕물 채우고 소방차를 몰던 기활이는 저수지에 들어간 뒤 쉰 넘어까지 나오질 않는다. 시란 걸 쓰고 읽을 때마다 나는 행간에 구명조끼가 있는지 두리번거린다. 홍수에 떠내려가는 암소의 마른 등, 그 등짝에 기활이가 앉아 있는지를. 이경록의..

합평의 시간 2025.04.08

봄2 /이동주

봄2 /이동주 연지빛 더운 구름에아, 비로소 어지러운 나의하늘, 아름아름 밝아오는귀설은 소리이제사 나의절벽은 뚫리는가. 이끼 입은 돌부처도피가돌아나의 그리움에 사윈 청춘의 부활. 서라벌 한나절을 무지개로아, 새로 돋는 이름에 취해오네. 「봄2」는 같은 시인 이동주의 작품이지만, 앞선 「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와 감정의 흐름을 보여줘요. 이 시는 강렬한 감각적 이미지, 내면의 변화, 그리고 되살아나는 생명감이 물씬 느껴지는 작품이에요.시의 해석과 감상1. “연지빛 더운 구름에 / 아, 비로소 어지러운 나의 하늘,”'연지빛'은 붉고 따뜻한 색감으로, 봄의 기운 혹은 격정적인 감정의 전조로 읽을 수 있어요.'어지러운 나의 하늘'은 내면의 혼란 혹은 변화의 전조. 이전과는 다른 봄이 다가오며 정서적 혼란이나 ..

합평의 시간 2025.04.08

봄 / 이동주

봄 / 이동주 계집에는 이름이 없대요나이도 모른대요저런 박살할년...강아지와 나란히 부엌에 앉아썩 비벼 맵게 먹고빨간 오리발 손에얼음이 박혔대요“올해 몇이지? ”어쩌다 나이를 물의면 살랑살랑 능금빛 얼굴을 두 쪽으로 쩍 벌려하얗게 돌아선대요 이동주의 「봄」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지만, 내용은 봄의 전형적인 이미지—꽃, 햇살, 따스함—보다는 한 여성을 중심으로 한 강한 인상을 줍니다. 감정과 상징이 응축된 짧은 시인데, 몇 가지 특징과 해석을 나눠볼게요. 시의 해석과 감상1. "계집에는 이름이 없대요 / 나이도 모른대요"여기서 ‘계집’은 다소 거칠고 낡은 표현으로, 여성을 낮춰 부르는 말입니다.이름도 나이도 없다는 건 존재가 불분명하거나 사회적으로 규정되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어요.2...

합평의 시간 2025.04.08

햇과부/ 한인자

햇과부/ 한인자 "햇과부, 어서 오셔.""??"황당한 호칭에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못 알아들은 줄 알고 거듭 말한다."햇과부, 어서 오시라고.""햇과부요?""그렇지. 너는 햇과부, 우리는 묵은과부."남편이 떠나고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가까운 두 선배가 맛있는 밥 먹자며 만나자고 했다. 약속 장소는 럭셔리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한껏 멋을 낸 선배들이 우아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 축 늘어져 들어오는 나를 반갑게 맞으며 큰소리로 해맑게 "햇과부'라고 불렀다. 선배들의 진정한 위로에 울컥했다.​다른 사람이 그렇게 부를까 겁나는 이름 '과부'를 두 선배는 거침없이 막 부른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나를 웃기겠다고 민망한 이름을 들석이며 고육지책을 쓰는 선배들의 작전에 말려들어 나도 모르게..

합평의 시간 2025.04.01

국지성 폭설 / 진서우

국지성 폭설 / 진서우 폭설이다. 창밖에 있는 것들은 형체를 잃고 침묵에 든다. 자정이 지나자 잦아들었던 바람이 다시 일어난다. 손에 든 책은 같은 페이지에 머물고,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자꾸만 밖을 내다본다. 세찬 바람에 지상으로 내려앉지 못한 눈이 먼 허공을 부유한다. 눈의 풍장같다.​오늘같이 눈 내리는 밤이면 그가 생각난다. 그런 날이면 또 한사코 베란다를 서성이며 바깥에서 내리는 눈을 안쪽에서 맞는다. 그날 그가 지나간 생과 사의 경계는 어디쯤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나는 그를 잘 모른다. 서로를 따뜻하게 안아주지도, 속엣것을 꺼내 보이지도 못했다. 그의 딸로 사십 년 넘게 살았어도 서로에게 다가서는 법을 몰랐다. ​아침이 되자 하늘이 말갛다. 경비원들이 치워 놓은 눈이 곳곳에 둔덕을 이..

합평의 시간 2025.04.01

기적의 사과 / 조계선

기적의 사과 / 조계선  썩지 않는 기적의 사과가 있다. 팔년이 지났지만 빛깔의 퇴색도 없다. 만물은 변한다는 진리를 거스르는 것일까. 스케치북 속 빨간 사과 두 알, 폴 세잔이 그린 사과와 닮았다. 덥석 한입 베물면 달콤한 과즙과 향이 입안을 가득 채울 것 같다. 맛의 기억은 또 다른 기억과 교집합을 만든다.  요즘은 기후 온난화로 사과가 전국 각지에서 재배되고 있다. 오십 여년 전 내 고향인 대구는 사과를 상징하는 도시였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진학했다. 스물의 나는 늘 고향이 그리웠다. 방학을 맞아 집으로 가는 길은 멀었지만 마음은 기차보다 빨랐다. 귀향에 들뜬 친구들의 수다가 잠잠해질 무렵 기찻길 옆으로 길게 늘어선 사과밭이 나타났다. 고향에 들어섰다는 반가운 신호였다. 그 순간의 기억조차도..

합평의 시간 2025.04.01

피아노 연주 / 김경숙

피아노 연주 /  김경숙 노을이 퍼져가는 저녁이다. 아들이 졸업 연주회에 초대하였다. 분주한 하루를 보냈지만 잃어버리지 않고 꽃다발도 준비하였다. 핑크빛 짙게 감도는 장미꽃 한다발을 아들처럼 가슴에 안고 기차를 탔다. 나는 분비는 사람들을 지나 조용한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기차는 서서히 아들을 향하여 떠나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앙상한 가지가 가을의 끝자락에서 손짓한다. 텅 빈 논을 지키는 희미한 가로등에 아들 얼굴이 비친다. 삼삼오오 모여 있는 길가의 초라한 집들이 정겹다. 기차는 한 마리 백마가 되어 힘차게 어둠 속을 달린다. 어느새 창밖 거리는 작은 불빛이 여기저기 어둠 속에서 반짝인다. 내려앉은 어둠은 며칠 전에 본 영화의 한 장면으로 나를 데려간다.어둡고 침침한 넓은 거실이다. 달빛..

합평의 시간 2025.03.25

윤석열 쿠데타가 한국 사회에 기여한 점 / 강병한 정치부장

윤석열 쿠데타가 한국 사회에 기여한 점 /  경향신문 강병한 정치부장 최재형 전 국민의힘 의원은 명절이나 집안 행사 때마다 애국가를 부른다. 본인만이 아니라 형수, 제수 등 온 가족이 함께 4절까지 완창한다. 국민의례도 한다. 그는 시쳇말로 ‘태극기 보수’에 가깝다. 가장 존경하는 역대 대통령도 이승만이다. 2022년 대선 경선에서 국민의힘 일부 강경파 의원은 대세인 윤석열이 아니라 최재형 캠프에 합류했다. 그는 지난달 고교 친구에게 문자 한 통을 받았다.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탄핵심판 국회 측 증인들의 진술은 가짜이고, 내란도 프레임이라는 내용이었다. 친구는 태극기를 들고 광화문 집회에 가자고 했다. 최 전 의원은 “(12·3 비상계엄은) 명백한 헌법과 법률 위반이고, 탄핵은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답했다..

합평의 시간 2025.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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