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평의 시간

진공 청소기/ 서안나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5. 4. 22. 11:39

진공 청소기/ 서안나

 

내 배는 항상 불러 있어요. 하지만 늘 배가 고파요. 눈에 보이는 건 모두 들이마시고 싶군요. 먼지가 가득 차면 주인은 내 배를 열고 더러워진 세상을 끄집어내죠. 내 뱃속엔 세상을 걸러내는 필터가 달려 있죠. 필터에는 단추, 하늘, 터진 신발, 개진 기왓장, 언덕, 노을, 정원이 딸린 계단, 풀밭을 뛰어다니는 소녀가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며 걸려 있기도 하거든요. 나는 그것을 내뱉고 한껏 가벼워진 몸으로 다시 세상을 들이마시지요. 어쩔 땐 티브이도 집어삼키고 집도 한 채 먹어치우죠. 오늘 아침엔 소녀가 풀밭을 머리에 이고 내 뱃속을 붕붕 날아다니네요. 소녀를 위해 화장품과 비둘기 몇 마리도 먹어야 할까 봐요. 주인이 다시 내 몸을 열고 있어요.

 

서안나의 **「진공 청소기」**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물건에 의인화된 감정과 철학을 불어넣는 시예요. 이 시는 겉으론 장난스럽고 유쾌하게 보이지만, 안쪽엔 기억, 소외, 소비, 존재론 같은 무거운 개념이 숨어 있어요. 하나씩 짚어볼게요.


💨 1. “내 배는 항상 불러 있어요. 하지만 늘 배가 고파요.”

이 첫 구절은 이 시 전체의 핵심 모순을 드러냅니다.

  • 항상 포화 상태지만 끊임없이 채워야 하는 존재—이건 진공 청소기의 정체성이자, 현대인의 은유예요.
  • 정보, 경험, 물건, 감정 등 계속 수집하고 소비하지만 결코 충족되지 않는 현대인의 내면을 보여주죠.

🧲 2. “눈에 보이는 건 모두 들이마시고 싶군요.”

  • 진공청소기는 보이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죠.
  • 이건 단순한 청소기가 아니라 욕망의 덩어리, 감각적 집착의 화신이에요.
  • “정보 과잉 사회”에서 모든 것을 흡수하고 걸러내고 다시 비워야 하는 인간의 내면 작용과도 겹쳐요.

🧃 3. “내 뱃속엔 세상을 걸러내는 필터가 달려 있죠.”

  • 진공청소기의 필터는 단순한 먼지 필터가 아니라 기억을 간직하고 걸러내는 은유적 필터입니다.
  • 그 안엔 **“단추, 하늘, 터진 신발, 언덕, 노을, 풀밭을 뛰어다니는 소녀”**까지 있어요.
  • 이건 모두 사소하지만 사라진 풍경들, 잊힌 것들, 폐기된 아름다움의 흔적이죠.

🧒 4. “소녀가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며 걸려 있기도 하거든요.”

  • 어린 시절, 기억, 혹은 상실된 순수로 읽히는 이 “소녀”는 지금 청소기의 뱃속, 즉 잊힌 세계에 갇혀 있어요.
  • "퍼덕거린다"는 표현은 기억이 살아 있고 탈출을 원한다는 징후예요. 그것은 여전히 우리 안에서 소생하려는 과거의 일부.

🐦 5. “화장품과 비둘기 몇 마리도 먹어야 할까 봐요.”

  • 현실 세계에선 너무 평범하거나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대상들.
  • 하지만 여기선 욕망과 자유(혹은 유희)의 상징물로 등장해요.
  • 화장품은 사회적 정체성, 비둘기는 도시의 일상과 감정의 상징으로 읽을 수 있어요.

🔄 6. 반복과 재생산 – 비우고 또 채우는 존재론

“나는 그것을 내뱉고 한껏 가벼워진 몸으로 다시 세상을 들이마시지요.”

  • 이것은 마치 인간의 감정 구조, 소비사회, 삶의 리듬을 함축한 문장이에요.
  • 슬픔도, 추억도, 쓰레기도 한 번 품고 나면 비워야 하고, 또다시 채워야 하죠.
  • 청소기는 단지 쓰레기를 삼키는 기계가 아니라, 현대인의 메커니즘을 빼닮은 감정의 기계입니다.

🧠 마무리 해석 요약

측면의미
청소기 욕망의 집약체, 기억과 쓰레기의 저장소
필터 무의식, 망각 속의 잊힌 풍경들
소녀 순수, 과거의 나, 살아 있는 기억
비우기와 채우기 인간 내면의 반복 구조, 감정의 메커니즘
의인화 사물을 통해 인간 내면을 반영하는 방식

📌 전체 인상

서안나는 이 시에서 사물을 통해 인간을, 일상을 통해 철학을 말합니다.
장난기 넘치는 서술이지만, 실은 기억과 욕망, 소비와 존재의 메타포예요.
삶의 많은 부분이 "쓰레기"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그 안에 여전히 퍼덕이는 감정과 기억이 살아 있다는 걸,
진공청소기의 필터 속에서 보여주는 거죠.

'합평의 시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광욕하는 가구 / 최영철  (0) 2025.04.22
수평의 힘 / 안정숙  (0) 2025.04.22
러시아 보드카  (0) 2025.04.22
플롯 속의 그녀들 / 서안나  (0) 2025.04.22
유령거미 / 서안나  (0) 2025.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