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광욕하는 가구 / 최영철
지난 홍수에 젖은 세간들이
골목 양지에 앉아 햇살을 쬐고 있다
그러지 않았으면 햇볕 볼 일 한 번도 없었을
늙은 몸뚱이들이 쭈글쭈글해진 배를 말리고 있다
긁히고 눅눅해진 피부
등이 굽은 문짝 사이로 구멍 뚫린 퇴행성 관절이
삐걱거리며 엎드린다
그 사이 당신도 많이 상했군
진한 햇살 쪽으로 서로 몸을 디밀다가
몰라보게 야윈 어깨를 알아보고 알은체한다
살 델라 조심해, 몸을 뒤집어주며
작년만 해도 팽팽하던 의자의 발목이 절뚝거린다
풀죽고 곰팡이 슨 허접쓰레기,
버리기도 힘들었던 가난들이
아랫도리 털 때마다 먼지로 풀풀 달아난다
여기까지 오게 한 음지의 근육들
탈탈 털어 말린 얼굴들이 햇살에 쨍쨍해진다
「일광욕하는 가구」는 재해의 상처를 입은 가구들을 통해, 인간의 삶, 노쇠, 가난, 회복을 은유적으로 그려낸 시입니다. 이 시는 사물을 생명처럼 다루며, 따뜻하면서도 뼈아픈 공감의 시선으로 우리의 현실을 응시합니다. 아래에서 주요 이미지와 의미를 살펴볼게요.
1. “지난 홍수에 젖은 세간들 / 골목 양지에 앉아 햇살을 쬐고 있다”
- 시는 재해의 흔적에서 출발합니다.
- 가구들이 ‘앉아 햇살을 쬔다’는 표현은 의인화를 통해 인간과 세간의 경계를 허무는 따뜻한 시선을 보여줍니다.
- 이 장면은 단순한 일상 풍경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존엄의 회복, 회한의 풍경이기도 해요.
2. “그러지 않았으면 햇볕 볼 일 한 번도 없었을 / 늙은 몸뚱이들”
- 여기서 가구는 늙은 몸, 곧 노쇠한 사람의 이미지로 겹쳐집니다.
- 늘 실내에서 묵묵히 존재했지만, 제 모습을 드러내본 적 없는 존재들 — 그건 곧 우리 사회의 잊혀진 이들이기도 해요.
- 재해가 아니었다면 드러날 일이 없었던 존재들. 역설적으로, 비극이 그들을 햇살 아래 데려다놓은 것이죠.
3. “작년만 해도 팽팽하던 의자의 발목이 절뚝거린다”
- 의자의 발목 = 사람의 관절
- 한 해 사이에 모든 것이 변하고 쇠약해졌다는 걸 보여줍니다.
- 시간과 고난의 흔적이 이렇게 사물에 투영됩니다.
4. “살 델라 조심해, 몸을 뒤집어주며”
- 이 장면은 가구들끼리 서로를 보살피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실은 가난한 사람들끼리의 연대, 삶의 애틋한 손길을 떠올리게 해요.
- 인간적인 교감이 사물에 투영된, 따뜻한 상상력입니다.
5. “버리기도 힘들었던 가난들이 / 아랫도리 털 때마다 먼지로 풀풀 달아난다”
- ‘버리기 힘든 가난’이라는 표현이 아주 강렬하죠.
- 가난은 물리적인 물건처럼 짊어지고 살아가는 무게이자, 동시에 버리고 싶어도 쉽게 버려지지 않는 기억입니다.
- 먼지처럼 날아가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 그런 성질이죠.
6. “여기까지 오게 한 음지의 근육들 / 탈탈 털어 말린 얼굴들이 햇살에 쨍쨍해진다”
- **‘음지의 근육들’**이라는 표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버티고 움직여온 존재들에 대한 찬사입니다. - 마지막의 “햇살에 쨍쨍해진다”는 문장은,
이 모든 고생과 가난을 통과한 존재들에게 빛과 회복, 존엄을 부여하는 듯합니다.
이 시의 정서를 요약하면:
가구 → 인간 | 노쇠, 상처, 고난의 삶을 은유 |
홍수 → 비극의 계기 | 삶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냄 |
햇볕 → 회복/존엄 | 잊힌 존재들이 비로소 주목받는 순간 |
의인화된 사물 | 인간적인 연민과 연대의 상징 |
먼지, 곰팡이, 절뚝거림 | 존재의 퇴화와 그 속의 아름다움 |
마무리 감상:
이 시는 “상처 입은 존재들의 햇살 아래 노출”을 통해,
존재의 가치와 생명력을 회복시켜주는 느낌을 줍니다.
가구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지고,
그 곁에 우리가 함께 앉아 있는 듯한 따뜻한 공생의 풍경이 그려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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