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3689

물고기 / 메리 올리버

물고기 / 메리 올리버 내가 처음 잡은물고기양동이에 얌전히누워 있지 않고퍼덕거리며얼얼한놀라운 공기 빨아들이고무지개 빛깔서서히 쏟아내며죽어갔지. 나중에나는 물고기 몸을 갈라살에서 가시를 발라내고먹었지. 그래서 바다가내 안에 들어 있지. 나는 물고기,물고기는 내 안에서 빛나네, 우린서로 뒤엉켜 다시 바다로돌아가겠지. 고통,그리고 고통, 또 고통으로우리 이 열정의 대장정 이어가고,신비에서 자양분 얻지.메리 올리버(1935~2019) 이 여름에 ‘물고기’ 하고 부르면, 은빛 비늘을 반짝이는 물고기 한 마리가 내 혓바닥 위에서 펄떡거릴 것만 같다. 멀리서 파도가 밀려오고, 내 몸은 바닷속에서 물고기들과 천천히 유영한다. 넘실대는 너른 바다를 꿈꾸며 앞으로 나아간다.메리 올리버는 처음 잡은 물고기를 양동이에 넣었..

글쓰기 공부방 2025.06.16

그러거나 말거나 / 이달균

그러거나 말거나 / 이달균 골목길 미용실에선 수다꽃이 피었습니다커트가 어떻고 파마는 또 어떻고한참을 기다렸는데도 끝나지 않습니다어제는 모종비, 오늘은 가루비미용실 앞 작은 텃밭엔 강냉이 새싹들이이모들 그러거나 말거나 세상 구경 한창입니다-이달균(1957-) 동네 사람들의 단골집 미용실에선 손님 여럿이 모여서 즐겁게 수다를 떨고 있다. 조금은 쓸데없는 말이 들어 있고, 또 조금은 쓸데없이 말수가 많지만 그 얘기가 꿀처럼 달기만 하다. 이런저런 얘기가 끝없고, 그 얘기 소리는 한데로 문 열고 나오듯 바깥으로도 들려온다. 바깥에는 비 자분자분 내리는데, 어제는 모종하기에 딱 좋은 비가 오고, 오늘은 가루처럼 잘게 부스러지듯이 비가 오고, 바깥으로도 들려오는 얘기 소리는 빗소리와 섞였을 테고, 얘기 소리는 빗..

글쓰기 공부방 2025.06.16

온 천국 3 / 안미옥

온 천국 3 / 안미옥 날지 못하는 새의 이름을 녹슨 나사깨진 창문에 비치는 얼굴을 나는 없는 것에 대해서만 말했다 무너지고 있는 집에서오랫동안 살면서 큰비가 올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창밖을 보지 않기로 했다얼굴이 벗겨질 것 같았다 죽은 비둘기떼의 펼쳐진 날개뒤집힌 우산들이 쌓여 있는 곳 나는 하류로 가지 못했다 허리까지 차올랐던 물이끌고 내려가는 것들을 생각했다 뿌리 뽑힌 풀들이 메말라 있어도끊어지지 않는 별 나는 이제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남아 있는 큰비가 온다나는 소문에서 가장 먼 곳으로 간다 [안미목 '온' 창비 2017]

글쓰기 공부방 2025.06.13

공명심이 빚은 오욕 / 이백

공명심이 빚은 오욕 / 이백 잠시 군왕의 옥 채찍을 빌려,연회석에 앉아 오랑캐 포로들을 지휘하리.남풍이 먼지 쓸 듯 오랑캐를 잠재우고,이 몸 서쪽으로 장안 황제 곁으로 나아가리라.(試借君王玉馬鞭, 指揮戎虜坐瓊筵. 南風一掃胡塵靜, 西入長安到日邊.)―‘영왕의 동쪽 순행을 찬양하다(영왕동순가·永王東巡歌)’ 제11수 이백(李白·701∼762)공명심 때문에 생애 최대의 오욕(汚辱)을 맛본 이백의 쓰라린 경험. 안사의 난 시기, 시인은 영왕(永王) 이린(李燐)의 막료로 들어간다. 현종의 비서직에서 쫓겨난 지 12년 만에 얻은 벼슬이었다. 여산(廬山)에 은거하며 출사를 꿈꾸던 그로서는 더없이 매력적인 기회였을 것이다. 영왕을 수행하면서 시인은 11수의 연작시를 지어 군대의 위용과 충군(忠君)의 의지를 과시한다. 이..

글쓰기 공부방 2025.06.13

솔바람에 풀잎 편지를 띄우고 / 이채

솔바람에 풀잎 편지를 띄우고 / 이채 그대 사랑하기엔 내 마음이 너무 떨려 솔바람에 풀잎 편지를 띄우고 들녘에 이름 모를 풀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대 가슴속에 묻어두기엔 이 순간이 너무 아려 솔바람에 풀잎 편지를 띄우고 바위틈에 내려앉은 그늘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대 그리워하기엔 꽃구름이 너무 고와 솔바람에 풀잎 편지를 띄우고 밤하늘에 떠도는 새벽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대 이대로 잊기엔 저 노을이 너무 붉어 솔바람에 풀잎 편지를 띄우고 석양에 걸린 고독한 밤바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대 기다리기엔 가는 봄이 너무 짧아 솔바람에 풀잎 편지를 띄우고 이대로 잠들어도 좋을 가슴이 되고 말았습니다 [출처 이채 제3시집 중에서]

글쓰기 공부방 2025.06.12

도리어 / 유수연

도리어 / 유수연 고양이나 강아지의 울음을 따라 해도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이었다 사람이기에 사람의 일을하는 것을 슬픔이라고 불렀다버리지 못할 슬픔을 사람의 꼬리라고 불렀다 건물에는 불이 꺼지고 켜진다빈 침대가 생기고 사람이 사라진다 사람의 일과 동물의 일은 생명의 일로 같아 그런데 고양이나 강아지도 겪는 일을 사람만 요란하게 해내려 해 건물에는 불이 꺼지지 않고벤치에 앉은 너를 안아보았다 빈 페트병처럼 곧 찌그러질 듯이 그러나 생각보다 비어 있지 않은 너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기로 했지만다짐은 포옹을 버텨내지못했다 다정이 가장 아픈 일이 되었다 돌아오는 새해에 사람이라면 사람의 일을 잊지 말아야겠다 생각한 일은 새해를 넘기지 못했다 그림자 같은 고양이들이 꼬리를 묶고사라지는 것을 본다 그림자 같음..

글쓰기 공부방 2025.06.11

해질녘 / 신경림

해질녘 / 신경림 꽃 뒤에 숨어 보이지 않던 꽃이 보인다.길에 가려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인다.나무와 산과 마을이 서서히 지워지면서새로 드러나는 모양들.눈이 부시다,어두워 오는 해 질 녘.노래가 들린다, 큰 노래에 묻혀 들리지 않던.사람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보인다.해 질 녘 사물들은 모습을 감춘다. 꽃 뒤에 숨어 있던 꽃은 물론이고, 꽃 앞에 있던 꽃마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던 길은 물론이고, 보이던 길조차 땅거미 속으로 사라진다. 나무와 산과 마을이 어둠에 지워지고 있는데 눈이 부시다니 어불성설 아닌가? 해 뜰 녘이라야 옳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고개가 주억거려지는 것은 육안이 아니라 심안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해 질 녘에 비로소 보이는 것들, 분별과 경계가 사라지면서 새롭게 드러나..

글쓰기 공부방 2025.06.11

고독 / 김광섭

고독 / 김광섭 내하나의 생존자로 태어나서 여기 누워 있나니한 간(間) 무덤 그 너머는 무한한 기류의 파동도 있어바다 깊은 그곳 어느 고요한 바위 아래내고단한 고기와도 같다.―김광섭(1905∼1977)1938년의 시집에 수록된 작품이다. 김광섭 초기 시의 대표적 작품이기도 하다. 거의 100년이 되었지만 지금 시대에 맞지 않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그런 시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상황은 그 반대다.김광섭 시인은 당대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었다.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감옥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런 이상과 현실 사이에 겪은 절망이 이 시에 담겨 있다. 그렇게 태어난 이 시는 100년을 지나오면서 여러 상황 위에서 읽힐 수 있는 시가 되었다. 시인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이 시가 살아온 역사는 시의 지층이 ..

글쓰기 공부방 2025.06.09

어머니는 전사다 / 이선애

어머니는 전사다 / 이선애 전화(戰火)가 휩쓸고 간 우물가어머니의 매운 손 끝에 당해 나뒹구는 잔해를 본다널브러져 말라붙은 피 묻은 살점텅 빈 소쿠리에 담긴 고무장갑축 늘어진 패잔병들 항아리 속에 누워고춧가루 붉은 약으로 상처를 싸매고 있다구설의 화살촉에 맞은내 가슴 속 상처도 보았는지어머니는 물 묻은 거즈로수 겹의 침묵으로 그것까지 동여매준다승리마저 잔인한 우물가 전쟁끝내 깊은 내상을 입고 쓰러진 어머니눈 오는 저녁의 잠꼬대를 듣는다폭설이 내리기 전 한 문장 한 문장전쟁을 마무리하라는 전언.(시집 ‘방울을 울리며 낙타가 온다’, 상상인, 2020)[시의 눈]평화가 숨 쉬는 산하, 넌지시 유월의 안경으로 내다보면 초연이 자욱하다. 갈라진 국토의 경계에서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며 가슴패기에 짙은 상흔을 ..

글쓰기 공부방 2025.06.09

눈물의 소리 / 김원식

눈물의 소리 / 김원식 애면글면 살다간한 생을 어찌 지울까사는 게 힘든 날엄마 생각이 절절하다뒤꼍 능소화 폈다고전화가 올 것만 같다목소리가 잊힐까봐엄마의 전화번호를차마, 지우지 못했다그리움 이는 저녁답휴대전화 속 엄마를꾸욱 눌러 본다제 눈물소리만 들렸다- 김원식 '눈물소리'시를 시이게 만드는 문장은 오직 단 한 줄이면 충분함을 다시금 확신하게 만드는 시다.어느 날 문득 절절하게 엄마 생각이 날 때, 목소리 잊을까 두려워 전화를 걸지만 들려오는 건 엄마 목소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눈물소리'뿐이라니. 시는 언제나 이처럼 예상치 못한 감각의 전환으로 놀라움을 준다.지하철 승강장에서 이 시를 발견하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휴대전화를 꺼내 보고 싶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보자. 저 너머로부터 눈물소리가 들려..

글쓰기 공부방 2025.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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