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보드카
떠나간 A 그녀가 가끔 보내오는 편지의 행간에는 러시아식 보드카 냄새가 진하게 묻어있다. 편지의 내용이 경건할수록 밤이면 위축된다는 그녀의 말처럼 내가 한없이 무거워지는 밤들이 계속되었다. 떠나야만 도달할 수 있다는 A의 경박한 문장이 경전처럼 읽히는 밤이면 B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가끔 S가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P의 술에 절은 중얼거림 들이 편파적인 나의 꿈을 비난하곤 했다. 나의 꿈은 형편없이 수축되었다. 편지를 쓴다는 것만으로도 슬퍼질 이유는 충분했다. 우리들은 가끔 소설의 내용과는 무관하게 슬퍼지고 유쾌해지고 싶었다. 나의 과거는 우울한 기호들로 기록되어 졌다. 사건과 사건이 모여 간단한 손동작만으로 사람들은 쉽게 사라졌다. 새벽이면 편지 속에서 나는 그녀들과 지루해지고 있었다. 엑스트라처럼 그녀들의 새벽을 맨 처음 산책하곤 했다. 언제나 모두가 위기였다. 새로운 등장인물들이 아침이 되자 거리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언제부턴가 절정 부분의 J에게 호기심을 느끼게 되어있다. 익명의 사건들이 기호들이 다시 결말들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
서안나의 **「러시아 보드카」**는 인간관계, 감정, 기억, 시간의 흐름을 마치 산문소설의 파편들처럼 구성한 시예요. 시인은 인물들의 이니셜과 단편적인 사건들, 그리고 감정의 잔향을 엮어 서사 구조를 갖춘 감정의 지도처럼 펼쳐 보입니다. 이전 시들—특히 「플롯 속의 그녀들」과 감정적, 구조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죠.
1. 러시아식 보드카 냄새 – 차가운 감정의 기호
“편지의 행간에는 러시아식 보드카 냄새가 진하게 묻어있다.”
- 보드카는 차갑고 강한 술이죠. 여기선 이별의 쓸쓸함과 절제되지 않은 감정의 상징으로 보입니다.
- A가 보내는 편지는 차갑지만 진한 감정의 잔재, 즉 떠나면서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관계의 흔적이에요.
- A의 말, “떠나야만 도달할 수 있다”는 건 역설적이죠. 이것은 부재를 통해서만 실체화되는 감정, 혹은 거리를 둠으로써만 이해되는 사랑을 뜻합니다.
2. 이니셜화된 등장인물들 – 관계의 익명성과 다층성
“B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가끔 S가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P의 술에 절은 중얼거림…”
- 이 시에서도 등장인물들은 모두 이니셜로 표기됩니다. 이건 실제 인물이라기보다는 감정의 파편, 시간의 조각처럼 다가오죠.
- 각 인물은 화자에게 다른 정서적 진동을 일으키며, 이 복잡한 감정의 겹은 마치 보드카처럼 투명하지만 깊은 흔들림을 남깁니다.
3. 편지와 글쓰기 – 기록은 감정의 누설
“편지를 쓴다는 것만으로도 슬퍼질 이유는 충분했다.”
- 편지는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감정을 고백하는 장치로 작용해요.
- 여기서 편지는 기억을 마주하는 의식이자, 부재를 체감하는 도구죠. 쓰면 쓸수록 슬퍼지고, 기억은 더 선명해져요.
- 그리고 “형편없이 수축된 꿈”은, 타인의 시선이나 감정에 휘둘려 왜소해진 자기 욕망의 잔해로 읽힐 수 있어요.
4. 지루해지는 새벽, 위기의 반복 – 감정의 소비
“새벽이면 편지 속에서 나는 그녀들과 지루해지고 있었다.”
- 슬픔, 설렘, 이별, 재회 같은 감정이 계속 재현되면서 마모돼 가는 상태.
- 감정도 플롯처럼 반복되면 ‘지루’해지고, 위기의 순간조차 익숙한 일상이 되어버리는 감정의 무뎌짐을 보여줘요.
- “엑스트라처럼 그녀들의 새벽을 맨 처음 산책하곤 했다”는 말은, 타인의 감정을 먼저 살피고 반응하는 화자의 내면 구조를 보여줍니다.
5. 절정의 J, 흘러가는 결말들
“언제부턴가 절정 부분의 J에게 호기심을 느끼게 되어있다.”
- ‘J’는 이제 막 등장한 감정 혹은 인물, 즉 새로운 가능성이자 서사의 전환점이에요.
- 하지만 이 호기심조차도 “결말들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는 문장으로 끝나면서, 모든 감정은 결국 종료를 향해 흐른다는 냉철한 인식을 던져요.
- 결국 삶은 서사의 반복과 소멸의 연속, 그리고 익명의 시간들이 만들어낸 복합적인 감정의 흐름이 되는 거죠.
시의 총체적 인상
이 시는 보드카처럼 차가우면서도 독한 감정의 언어로 짜여 있습니다.
감정은 분명 존재하지만 익명성, 반복성, 메마름 속에서 점점 사그라들죠.
서안나는 ‘글쓰기’와 ‘편지’, ‘이니셜’이라는 장치를 통해 우리가 겪는 감정의 희석, 인간관계의 소모, 그리고 기억의 파편화를 섬세하게 드러냅니다.
마무리 요약
「러시아 보드카」는 인간관계의 잔향과 감정의 반복에 지친 화자가, 감정의 구조 자체를 해체해 보려는 산문시적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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