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평의 시간

달팽이 / 정호승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5. 3. 25. 14:48

달팽이 / 정호승

 

봄비가 내린다.

리어카에 종이박스를 가득 싣고

굽은 허리를 더 굽히고

낡은 도시 변두리

재개발 지역 골목의 언덕길을

할머니 한 분

느릿느릿 달팽이처럼 기어오른다.

낡은 리어카를 끌고

봄비가 그칠 때까지

이웃들이 이사 간 텅 빈 집

처마 밑에 납작하게 홀로 앉아

비 젖은 종이 박스를 찢어

맛있게 잡수신다

 

정호승의 달팽이는 봄비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한 할머니의 모습을 통해 가난과 고단한 삶,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인간적인 애환을 담담하게 그려낸 시입니다.

1. 달팽이와 할머니의 대비

시의 제목인 달팽이는 단순한 생물적 의미를 넘어, 느릿느릿한 움직임과 삶의 무게를 상징합니다.

  • "굽은 허리를 더 굽히고"
  • "느릿느릿 달팽이처럼 기어오른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의 모습과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 가는 모습이 달팽이와 겹쳐지며, 그녀가 살아온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2. 공간과 상황의 상징성

  • "낡은 도시 변두리", "재개발 지역 골목의 언덕길"
    이 문장들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공간을 상징합니다. 재개발 지역이라는 배경은 이미 떠난 사람들과 대비되는 할머니의 고립된 모습을 더욱 강조합니다.
  • "이웃들이 이사 간 텅 빈 집"
    이 문장은 공동체가 해체되고, 홀로 남은 할머니의 외로움을 보여줍니다. 떠난 이웃들과 달리 할머니는 아직 그 공간에 남아 있습니다.

3. 비 젖은 종이박스와 생존

  • "비 젖은 종이 박스를 찢어 맛있게 잡수신다."
    이 부분은 특히 인상적입니다. 현실적으로 종이박스는 음식이 아닙니다. 하지만 시인은 *“맛있게 잡수신다”*라고 표현함으로써, 할머니의 생존 방식과 삶의 쓸쓸함을 더욱 강조합니다.
    이는 가난 속에서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보여줍니다.

4. 시의 감정과 메시지

이 시는 비극적이지만, 동시에 담담한 어조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할머니의 고단한 삶을 애절하게 그리면서도 과장 없이 사실적으로 전달합니다.

봄비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지만, 할머니에게는 여전히 고단한 삶이 계속될 뿐입니다.
🐌 달팽이처럼 느리고 힘겨운 삶 속에서도, 그녀는 묵묵히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