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퇴근을 하다가 / 유병록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2. 4. 29. 06:50

퇴근을 하다가 / 유병록

저는 성실한 사람입니다
늦지 않게 일어나서 늦지 않게 회사에 도착합니다
당연한 미덕입니다

복도에서 누군가와 마주칠 때마다
웃으며 인사합니다
일터의 소중한 동료들입니다

바닥에 떨어진 종잇조각을 줍기도 합니다
제 일터니까요

회사에는
즐거운 일도 있고 괴로운 일도 있습니다
대체로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저 일이 있습니다
저는 성실한 사람답게 일하고 일합니다

일이 많다고 힘겨워하거나
일이 적다고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루를 무사히 마치고
퇴근을 하다가
회사 건물을 올려다봅니다
무사한 하루란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저기 허공에
한평 남짓한 제 자리가 있습니다
내일 아침에도 제 자리일 것입니다

저기서
꼭 제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일을
제가 하고 있습니다
그게 참 마음에 듭니다

* 유병록,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에서 (94~95)
- 창비시선 450, 초판 1쇄, 20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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