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 / 신경림
해질녘 / 신경림 꽃 뒤에 숨어 보이지 않던 꽃이 보인다.길에 가려 보이지 않던 길이 보인다.나무와 산과 마을이 서서히 지워지면서새로 드러나는 모양들.눈이 부시다,어두워 오는 해 질 녘.노래가 들린다, 큰 노래에 묻혀 들리지 않던.사람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보인다.해 질 녘 사물들은 모습을 감춘다. 꽃 뒤에 숨어 있던 꽃은 물론이고, 꽃 앞에 있던 꽃마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던 길은 물론이고, 보이던 길조차 땅거미 속으로 사라진다. 나무와 산과 마을이 어둠에 지워지고 있는데 눈이 부시다니 어불성설 아닌가? 해 뜰 녘이라야 옳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고개가 주억거려지는 것은 육안이 아니라 심안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해 질 녘에 비로소 보이는 것들, 분별과 경계가 사라지면서 새롭게 드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