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능소화 / 문혜진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6. 5. 4. 18:27

능소화 / 문혜진

 

능소화가 저녁의 관을 길게 울리고

산비둘기 울음이

부풀었다 사그라진다

길 아래 어둠이 천천히 고일 때

운구차 한 대가

빛을 가만히 끌고 지나갔다

-문혜진(1976~)

 

능소화는 노란빛이 도는 붉은색 꽃이 핀다. 나팔 모양의 꽃이 피는 덩굴나무이다. 능소화가 핀 것을 보고 있었을 때 시인은 누군가 관악기를 불고 있는 것만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더 보태어 시인은 관악기처럼 생긴 능소화에서 울려 퍼져 나올 법한 소리를 산비둘기 울음소리와 절묘하게 겹쳐 놓는다. 산비둘기 울음소리가 부풀었다 꺼지는 것은 관악기를 부는 사람의 길게 들이쉬었다 내쉬는 호흡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집 담장 아래 피었을 능소화와 먼 산에서 우는 산비둘기 사이에 놓여 있는 원근(遠近)의 거리감을 자유자재로 감각하는 시인의 역량도 잘 느껴진다.

저녁이 더 깊어져 어둑어둑해지고, 능소화의 환한 꽃이 떨어지고, 그것을 시인은 운구차가 빛을 끌고 지나가는 것으로 표현한 듯하다. 이 대목은 여러 맥락으로 읽을 수 있을 텐데, 빛의 사라짐은 꽃의 낙화, 일락서산(日落西山), 계절의 지나감, 한 사람의 별세(別世) 등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꽃이든 사람이든 모든 생명은 맑은 음악과 밝은 빛을 지니고 있다.

[조선일보 문태준 시인]

'글쓰기 공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름이 없는 순간 / 문혜진  (0) 2026.05.04
개의 질책 / 루쉰  (0) 2026.05.04
숲속의 의자 / 이상국  (0) 2026.04.29
오랜만에 가본 고향 / 이양자  (0) 2026.04.27
여명 / 손영란  (0) 2026.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