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는 것 기특해라 / 서정주
봄이 와 햇빛 속에 꽃피는 것 기특해라.
꽃나무에 붉고 흰 꽃 피는 것 기특해라.
눈에 삼삼 어리어 물가으로 가면은
가슴에도 수부룩히 드리우노니
봄날에 꽃피는 것 기특하여라.
-서정주(1915-2000)
봄 햇빛은 부드럽고 환하고, 꽃나무마다 제 꽃을 달아서 세상은 온갖 꽃으로 가득하다. 이 세계가 큰 꽃바구니 같다. 시인은 꽃이 피는 것이 신통하다고 말하면서 그 꽃은 우리의 가슴에도 핀다고 말한다. 시인은 만화(萬花), 즉 여러 꽃을 본 후로 잊히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듯했을 것이다. 그때에 물가로 갔을 것인데, 물의 수면에 “붉고 흰 꽃”이 깃들고 아래로 늘어지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물의 맑은 수면은 우리의 가슴이요, 선한 내면으로 알았을 것이다.
이 시에는 어렴풋이 어떤 면(面)이 보인다. 꽃이 피는 현상을 평면에 비치는 것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평평한 면은 촉촉한 막을 지닌 눈, 깨끗한 물의 고요한 수면, 어질고 안정된 마음으로 각각 이해된다. 비로소 평이하게 읽히던 시가 예사롭지 않은 시로 태어나는 순간이다.
내 집 마당에는 석류꽃이 피어서 요즘은 그 꽃을 본다. 시인은 석류꽃을 “가야금 소리로/ 피는 꽃”, “영원으로/ 시집 가는 꽃”이라고 표현했다. 그러고 보니 올해 5월 20일은 시인의 시집 ‘질마재 신화’가 출간 50주년을 맞는 날이다.
[조선일보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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