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거미 / 서안나
나의 행성이 조심 조심 흔들린다
누군가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섰다는 신호다
먹이가 걸려들면
행성은 죽음의 파장으로 술렁거린다
나는 내 비애로 짠 거미줄을 밟고 헤치며
조심스럽게 나아간다
긴 다리로 허공을 짚어나가
내 새끼가 자라날 먹이의 안전한 몸 속에
푸른 꿈을 주입시킨다
조금씩 마비되어 가는 먹이 속의 풍경들
행성에서 조급함은 용납되지 않는다
악어처럼 숨을 죽이며
허공에 몸을 숨겨놓고
추락하는 이카루스 같은 먹이가
행성에 불시착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도시의 어둠 속에 날아오르는
욕망의 날개소리를 빠르게 파악해야한다
내 안의 거친 식욕이 극세사로 방출되어
또 한 번 사냥감을 칭칭 동여맨다
이 세링케티에선
먹이가 걸려들 때마다
우주로 별이 하나 지고
조심스레 별 하나 뜬다
나의 행성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서안나의 **「유령거미」**는 극도로 감각적이고 은유적인 시로, 먹이와 포식자, 욕망과 통제, 삶과 죽음의 관계를 정교한 이미지들로 풀어낸 작품이에요. 시 속 화자는 단순한 ‘거미’가 아니라 자기 세계를 짜고 지키는 존재, 즉 감정과 욕망, 생존을 교차시키는 은밀한 우주의 주인처럼 느껴지죠.
유령거미 – 존재의 은유
“나의 행성이 조심 조심 흔들린다”
- 이 첫 줄은 이 시의 화자가 단순히 거미가 아니라, **자기만의 작은 우주(행성)**를 가진 존재임을 보여줘요.
- "조심 조심 흔들린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이 행성은 외부와의 섬세한 접촉에 반응하는 감각기관처럼 작동해요.
- 먹이가 들어오면 그 균형이 깨지고, 죽음의 파장, 즉 위기이자 기회가 시작됩니다.
“비애로 짠 거미줄” – 감정의 도구화
“나는 내 비애로 짠 거미줄을 밟고 헤치며”
- 거미줄은 보통 생존의 도구지만, 여기선 비애, 즉 감정으로 만들어진 상징적인 구조예요.
- 이 줄은 화자의 정서적 외피, 또는 내면적 방어기제로도 읽히며, 외부 세계와의 연결선이자 거리감으로 작용하죠.
- 이 시에서 감정은 살아남기 위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식욕, 꿈, 기다림 – 생존의 역설
“내 새끼가 자라날 먹이의 안전한 몸 속에
푸른 꿈을 주입시킨다”
- 거미는 먹이를 단순히 ‘죽이는’ 게 아니라, 그 안에 꿈을 심어요.
- 여기서 꿈은 희망이 아니라 거미 새끼의 생존 기반이라는 점에서 다소 냉혹한 상징이죠.
- 화자의 세계는 생존을 위한 ‘꿈’을 타인의 몸 안에 주입하며 유지돼요. 이건 삶의 연쇄적인 착취 구조일 수도 있고, 예술이 현실을 포획하고 이용하는 방식일 수도 있어요.
행성, 우주, 사냥 – 메타포의 확장
“이 세링케티에선
먹이가 걸려들 때마다
우주로 별이 하나 지고
조심스레 별 하나 뜬다”
- ‘세링케티’는 생태계의 포식과 생존이 일어나는 현장이고, 화자의 세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말이에요.
- “별이 진다 / 별이 뜬다”는 문장은 삶과 죽음의 순환, 자연 질서 속의 감정의 소멸과 갱신을 암시하죠.
- 이 문장에서 특히 아름답고 비극적인 리듬감이 느껴집니다. 마치 먹이의 죽음이 새로운 우주를 시작하게 만드는 종말이자 시작의 상징처럼요.
시 전체의 정조
이 시는 단순히 ‘거미’의 세계를 묘사하는 생물학적 리얼리즘이 아니라, 시적 자아의 존재 방식에 대한 우화예요. 화자는 자기 세계(행성) 속에서 철저히 통제하며, 외부와의 접촉(먹이)을 통해 생존하고 변화해요. 그 행위는 잔인하면서도 치밀하고, 감정적이면서도 절제돼 있죠.
시인적 시선
서안나의 작품은 도시적 감각, 어둠 속 욕망, 죽음과 삶의 섬세한 줄타기가 자주 등장해요. 「유령거미」는 그런 그녀의 시 세계를 가장 응축된 이미지들로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예요. 섬세한 존재들이 어떻게 자기 감정과 욕망, 생존을 엮어 하나의 은밀한 우주를 만들어내는지를, 이 시는 고요하지만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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