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롯 속의 그녀들 / 서안나
너무 많은 날들이 흘렀다
골목 끝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사건은 이미 후반부로 치닫고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이 도시를 떠나는 플롯에 포함되어 있었다. 오래된 통조림처럼 잔뜩 상한 그녀의 탈주계획은 예견된 것이었다. 소설 시작 부분부터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몇천 개의 태양이 티슈처럼 구겨져 배경으로 버려졌다. 나와 S와 A와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아침이면 부지런히 자신의 일터로 재배치되곤 했다. A의 역할은 나를 늘 번득이는 칼날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나를 상처로 만들곤 다른 풀롯 속으로 사라져 버리곤 했다. 버려진 태양과 도시와 빌딩과 카페와 푸른 초저녁이 주도면밀하게 A를 회상하는 복선으로 설정되곤 했다.
서안나의 **「플롯 속의 그녀들」**은 마치 한 편의 은유적인 메타픽션처럼 읽혀요. 시의 화자는 자신의 삶과 감정을 **소설의 구성 요소(플롯, 복선, 배경, 등장인물)**처럼 설명하며, 이 모든 것이 계획된 서사, 혹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인식을 보여줍니다. 현실을 이야기처럼 바라보는 이 시의 시선은 매우 지적이면서도 감정적으로 무기력한 울림을 줘요.
1. ‘그녀의 탈주계획’과 예견된 결말
“그녀는 오랫동안 이 도시를 떠나는 플롯에 포함되어 있었다.”
“소설 시작 부분부터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 이 문장들은 삶의 사건이 이미 각본처럼 짜여 있었다는 체념을 드러내요.
- ‘플롯’이라는 단어를 통해 사람의 선택과 감정조차 정해진 이야기의 일부라는 감각을 심어줍니다.
- 그 속에서 ‘그녀’는 탈주자, 즉 플롯을 깨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 이탈마저도 예정된 전개라는 점이 아이러니하죠.
2. 복수의 자아와 등장인물: S, A, 그리고 ‘나’
“A의 역할은 나를 늘 번득이는 칼날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 여기서 A는 단순한 인물이 아니라, 화자 안의 내면 갈등 혹은 감정적 기폭제로 읽혀요.
- S, A와 같은 이니셜은 감정의 상징 혹은 기억의 파편으로 기능하며, 이름을 가지지 않는 대신 더 많은 감정을 떠안게 되죠.
- A가 “다른 플롯 속으로 사라져 버리곤 했다”는 표현은, 삶의 관계들이 마치 서사의 장면처럼 들어왔다 나가는 덧없음을 드러냅니다.
3. 배경조차 역할을 수행한다: 태양, 도시, 빌딩
“버려진 태양과 도시와 빌딩과 카페와 푸른 초저녁이 주도면밀하게 A를 회상하는 복선으로 설정되곤 했다.”
- 이 문장은 정말 인상적이에요. 자연과 도시, 시간조차 하나의 문학적 장치로 묘사되며, ‘그녀’ 혹은 ‘A’를 회상하도록 짜인 세계처럼 느껴지죠.
- 시인은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플롯 장치로 보여주며, 그 안에서 화자는 배경과 감정 모두에 조종당하는 존재로 묘사돼요.
시 전체의 정조: 메타적 자의식
이 시는 마치 한 편의 소설 속 화자가 스스로의 서사 구조를 인식한 채 말하는 것처럼 구성되어 있어요.
- 자기 삶이 이미 글로 쓰인 것처럼 흘러가고 있다는 환상 혹은 자각
- 감정이 고조되지 않도록 거리를 둔 채 관찰하려는 태도
- 하지만 그 속에서도 새어나오는 슬픔과 무력감
이것은 매우 현대적인 자의식, 혹은 관계에 대한 허무와 체념을 보여주는 방식이에요.
마지막 한 줄 요약
"플롯 속의 그녀들"은 삶이 이미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짜여진 것이라는 자각 속에서, 관계와 감정의 소멸을 무덤덤하게 직면하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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