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평의 시간

비밀 도서관 / 이지현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5. 3. 18. 13:37

비밀 도서관 / 이지현

 

철컹, 대문이 열렸다. 목에 건 열쇠 목걸이를 티셔츠 안으로 추려넣었다. 열쇠를 자주 잃어버리는 딸을 위해 엄마가 대문 열쇠를 가죽줄에 꾀어 묶은 목걸이였다. 엄마랑 세 들어 살던 커다란 단독주택은 한낮이면 늘 비어 있었다. 주인집은 현관 안쪽으로 현관이 나 있어 우리 집에서 문이 보이지 않지만 조용한 것으로 보아 오늘도 빈집 같았다.

주인집 식구들은 아침 일찍 나가 한밤중에 귀가했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한낮에 집에 돌아와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혼자 지냈다. 심심하거나 무섭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도 없을 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 일은 오히려 누군가의 방해를 받지 않아야 가능했다.

집에는 지하실이 있었다. 따로 문이 달려 있지 않은 개방형이었는데 열 개가 넘는 계단을 깊이 내려갔다. 넓은 건물에 걸맞게 지하실도 컸지만 천장 가운데 백열등 하나만 달려 있어 불을 켜도 사방 구석까지는 빛이 닿지 않았다. 스위치를 켜고 하나, 둘, 셋, 넷, 다섯쯤 세면 비로소 눈이 어둠에 적용했다. 그때부터 나의 탐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호시김에 처음 계단을 내려갔던 날. 나는 낡은 자전거와 오래된 가구들 옆으로 쌓여 있는 수백 권의 책들과 마주했다. 지하실 바닥에는 크기가 제각각인 책들이 노끈으로 이삼십 권씩 묶여 이리저리 놓여 있었다. 귀한 책들이 아무렇게나 곰팡이 핀 어둠 속에 방치되어 있는 걸 보면서 나는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론 무척 반가웠다.

당시 우리 셋방은 방 한 칸과 작은 부엌이 나란히 놓인 일자형 구조였다. 방에는 작은 장롱과 TV, 낮은 책장과 앉은뱅이 화장대가 전부였다. 많지 않은 살림살이에도 엄마랑 단 둘이 누워 잘 만한 공간밖에는 남지 않았다. 나는 독서를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좁은 방에는 책을 들여놓을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읽던 책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늘 새로운 책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참이었다.

그랬던 나에게 낮은 백열등 조도 아래 발견한 책들은 보물섬에 무심히 쌓인 보물처럼 찬란했다. 호기심과 주려움을 동시에 느끼며 지하실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고전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던 아이는 <레미제라블>과 <삼총사> <폭풍의 언덕>같이 암호화된 듯한 낯선 제목들을 손으로 짚어가며 천천히 해석해나갔다. 그날부터 나는 지하실에 몰래 들어가 책을 빌려 읽기 시작했다.

집주인 식구들에게 들키지 말아야 했다. 책 한 권을 고르는 일은 그래서 신중했다. 우선 책더미를 묶어둔 매듭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한 권씩 천천히 살피보다 대여할 책을 골랐다. 책 고르는 과정이 끝나면 빌린 책의 부재가 티나지 않게 더미를 자연스레 정리한 뒤 풀어둔 끈을 다시 묶었다. 혹시 쌓아올린 순서를 기억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책을 섞지 않았다. 나는 지하실 비밀 도서관의 사서이자 대여자였다.

매듭을 어떻게 묶은들 관심이나 두었을까? 책이 쌓인 순서 역시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그때 대학생이던 집주인 오빠는 독서보다는 놀기 바빴고, 주인아주머니 역시 사교로 분주했던 '사모님'이었다. 그 책들의 주인일 것 같은 아저씨는 내가 그 집에 사는 동안 얼굴을 몇 번 마주칠까 말까 할 정도였다. 집 근처 대학교의 교수님이 아닐까 엄마랑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아저씨의 직업이 무엇이든 지하철에 있던 책은 보통 사람들이 소유하기엔 매우 방대한 양이었다.

방치된 책들이 그 정도면 집 안에는 얼마나 많은 책이 더 있을까. 궁금해도 그 집은 내가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었다. 나는 그저 접근 가능한 책이라도 하릭된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이 읽어야 했다. 지하실 도서관에 갈 때마다 내 마음은 분주했다. 책을 고르다 누구와 마주칠까 심장은 늘 두근거렸다. 내려갈 때, 올라갈 때 인기척이 없는지 숨죽여 살폈다.

그럼에도 읽을 책이 많다는 건 두려움을 잊을 만큼 즐거운 일이었다. 책 한 권을 골라 무사히 지하실을 빠져나오면 큰일을 해낸 듯 성취감이 들었다. 다 읽으면 반납하고 새로운 책을 빌렸다. 텁텁한 곰팡이 냄새와 어둑한 불빛 아래 책을 고르는 일에 익숙해져갔다. 그즈음 여름 장마가 시작되었다.

며칠 동안 비가 많이 내렸다. 마당의 잔디에 작고 큰 웅덩이들이 생겼다. 방문을 열고 툭툭 빗방울이 웅덩이를 때라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지쳤던 날. 집주인 식구들이 분주하게 집을 돌아다녔다. 그 와중에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한 것은 아저씨가 들락거리며 책무더기를 꺼내 나오는 일이었다. 게속된 비에 지하실 책들이 물에 잠기고 있었다.

내 가슴은 쿵, 하고 내려앉았다. 엄마는 비 들이치다며 방문을 닫으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저씨가 지하실로 들어갔다 나오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저씨는 흠뻑 젖어버린 책들 중 건질 만한 것은 한쪽으로 빼두고 회복 불가능하다 싶은 책들은 비 내리는 마당에 가차 없이 던져버렸다. 내가 미처 읽지 못한 책들이 파지로 버려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아저씨 팔을 잡으며 "제발 버리지 마세요! 제가 잘 말려볼게요."하고 사정하고 싶었지만 지하실 도서관에서 내가 책을 빌렸다는 건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안타까운 마음과 상관없이 그날 대부분의 책들이 버려졌다. 이후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은 침수를 막는 방지턱과 두꺼운 문이 생겼고 늘 잠물쇠로 잠겨졌다. 책을 만나러 갔던 깊은 계단 길은 초대받지 않은 나에게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방이 두 개인 집으로 이사를 했다. 엄마는 내 방에 커다란 책장을 들이고 그 동안 못 사준 다양한 책들을 빼곡하게 채워주셨다. 더 이상 나는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 남의 책을 훔쳐 읽지 않아도 되었다. 읽다가 울림이 있는 내용에는 요란하게 밑줄을 치고, 읽던 페이지를 당당하게 모서리 접어 표시해도 되는 내 책을 갖게 되었다.

깊은 계단을 내려가 컴컴한 불빛과 곰팡이 냄새에 싸여 낯선 책을 찾던 나의 비밀 도서관. 은밀했던 탐색은 10살의 봄부터 여름까지, 반 년을 채 계속하지 못했지만 그 스릴과 설렘은 평생 지울 수 없는 내 소중한 유년의 추억이다.

 

 

 

어린 시절 비밀스럽게 지하실에서 책을 읽었던 경험을 회상하는 자전적 에세이입니다.

주요 내용 요약

  1. 배경
    • 초등학교 3학년이던 화자는 엄마와 함께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으며,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 집주인의 넓은 단독주택에는 지하실이 있었고, 거기서 수백 권의 책을 발견하게 된다.
  2. 비밀 도서관의 발견
    • 책을 좋아하지만 공간이 부족해 책을 마음껏 소유할 수 없었던 화자는 지하실의 책들을 몰래 빌려 읽기 시작한다.
    • 집주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신중하게 책을 고르고, 원래 상태처럼 돌려놓는 등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 지하실은 곰팡이 냄새가 나고 어둡지만, 그곳에서 책을 찾는 과정은 설레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3. 비밀 도서관의 끝
    • 여름 장마철이 되어 지하실이 침수되면서 책들이 물에 젖어버린다.
    • 집주인이 젖은 책들을 골라내 일부는 버리고, 결국 지하실 문이 잠겨 더 이상 들어갈 수 없게 된다.
  4. 이후 변화
    • 새로운 집으로 이사한 후, 엄마가 화자만의 책장을 마련해 주면서 자유롭게 책을 가질 수 있게 된다.
    • 하지만 지하실에서 책을 몰래 읽던 그 짜릿한 경험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는다.

주제 및 의미

  • 책을 향한 갈망: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새로운 책을 읽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의 강한 열망이 잘 드러남.
  • 비밀스럽고 짜릿한 경험: 금지된 공간에서 몰래 책을 읽는 과정이 스릴 넘치는 모험처럼 묘사됨.
  • 유년 시절의 소중한 추억: 비록 오래 지속되지 못했지만, 그때의 경험이 성장하면서도 중요한 기억으로 남음.
  • 환경의 변화와 성장: 비밀 도서관이 사라진 후, 더 넓은 집과 자신의 책장이 생기면서 한 단계 성장한 느낌을 줌.

이 글은 단순한 책 읽기의 경험을 넘어, 어린 시절의 열정과 모험심, 그리고 변화하는 삶 속에서 얻은 깨달음을 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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