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 / 이희수 <2025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거대한 알이 깨지고 흰자처럼
달이 흘러 나왔다 어둠이 왔다
여자는 폐건전지를 투명하고 긴 통에 모은다 위험한 유리 기둥이 나타난다 고요로 쌓은 돌무덤과 따로 함께였다가 함께 혼자인 구석이 생겨난다 주석이 본문보다 더 긴 하루이다 분리 수거를 마친
여자는 댓글을 읽는다 잘근잘근 씹으며 누군가를 죽이는 잔뜩 벌린 입이 있다 냉장고 문 손잡이를 잡고 여자는 가만히 얼어붙는다 쥐도 새도 모르게 누군가 죽어가는 꾸욱 다문 입이 있다 거대한 얼음이 냉장고에서 걸어나와 빙수 기계에 올라 앉는다 뼛가루가 수북해질 때까지 돌리고 돌려도 끝끝내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갔을까
여자는 새발뜨기를 한다 새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발자국을 찍고 시접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닫힌다 옷감은 희고 발자국은 푸르다 끝단이 닫히고 쌀무더기에 새발자국이 찍힌다 바느질을 끝낸
여자는 부러진 손톱을 금 간 식탁 유리에 올려놓는다 추억을 새기듯 꽃물을 들여도 길어난 시간은 잘려 나간다 손톱을 깍는 동안 곰팡이가 빵을 먹어버린다 좋은 빵인 줄 알게 된 순간 버려야 할 빵이 된다 좋은 사람일지 모른다는 예감은 둘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난 뒤에야 찾아온다 여자는 식탁 유리를 갈기로 한다 차가운
유리 기둥 안에 장기를 기증한 시신이
들어 있다 제대로 버리는 일이 남았다
이희수 시인의 *'애도'*는 상실과 죽음을 깊이 있게 성찰하는 작품입니다. 시는 현실과 상징이 교차하는 몽환적인 장면들을 통해, 애도의 과정이 얼마나 복합적이고 고독한지 드러냅니다.
첫 연에서 "거대한 알이 깨지고 흰자처럼 달이 흘러 나왔다"는 구절은 탄생과 죽음의 상징성을 동시에 내포합니다. 달이 어둠과 함께 등장하는 장면은, 누군가의 부재와 그로 인한 공허를 표현하는 듯합니다.
여성이 폐건전지를 모으는 장면은 애도의 반복성과 일상 속 무기력함을 은유합니다. "위험한 유리 기둥"은 깨지기 쉬운 감정 상태를 상징하며, "고요로 쌓은 돌무덤"은 죽은 이를 기리는 내면의 상징물로 읽힙니다.
**"주석이 본문보다 더 긴 하루"**라는 표현은 부수적인 것(주석)이 본질(본문)을 압도하는 상황을 암시합니다. 이는 애도하는 사람의 일상이 상실의 무게에 압도되는 모습을 은유적으로 보여줍니다.
중반부에서 "여자는 댓글을 읽는다"는 장면은 현대 사회에서의 소통과 단절, 그리고 익명의 폭력성을 드러냅니다. "누군가를 죽이는 잔뜩 벌린 입"이라는 표현은 익명 속에서 타인을 해하는 무자비함을 나타내며, 여성이 냉장고 문 손잡이를 잡고 얼어붙는 모습은 상실과 공포에 사로잡힌 순간을 상징합니다.
빙수 기계에서 뼛가루가 쏟아지는 장면은 죽음의 물리적이고 직설적인 이미지로, 삶과 죽음이 혼재된 불안한 감각을 불러일으킵니다. "끝끝내 보이지 않는다"는 문장은 애도의 과정에서 명확한 해답이나 결말을 찾을 수 없다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시 후반부에서는 바느질, 부러진 손톱, 곰팡이가 핀 빵 같은 소소한 일상적 행위들이 죽음과 연결됩니다. "좋은 사람일지 모른다는 예감은 둘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난 뒤에야 찾아온다"는 문장은, 소중한 존재를 잃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감정의 아이러니를 담고 있습니다.
마지막 연에서 "유리 기둥 안에 장기를 기증한 시신이 들어 있다"는 장면은 죽음을 물리적이면서도 숭고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제대로 버리는 일"이라는 구절은 남겨진 사람이 감당해야 할 애도의 무게와 책임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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