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 최호택
눈을 떴을 때 내 앞에는 두 손을 겹쳐 가지런히 모은 여인이 서 있습니다. 손은 딱할 정도로 말라 있었고 푸른 핏줄이 어지럽게 손등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흔한 실반지 하나 끼지 않은 손가락이 더 길게 보였습니다. 검은 색 진바지에 털이 뭉뚝하게 잘린 점퍼를 입고 있었습니다. 영국 왕실 문양의 금빛 단추가 유난히 반짝였습니다. 왼쪽 어깨로부터 오른쪽으로 가방을 둘러매고 있었고, 그 가장은 손바닥 두 개쯤 크기의 다이야몬드 문양으로 누빈 검은 색이었습니다. 왠지 그녀의 얼굴이 슬픔에 잠겨 있는 것 같았습니다. 파리한 손으로 무릎 위를 긁고는 다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궁금했지만, 몰래 그녀를 관찰한 미안함 때문에 얼굴을 올려다보지는 않았습니다. 자리를 양보할까 하고 용기를 내 얼굴을 슬쩍보았으나 아픈 기색은 없었습니다. 공연히 그녀가 참 안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2 가을이 깊어가면서 꽃이 진 풀들은 조용히 한여름 동안 입었던 형형색색의 옷을 벗어버리고 갈색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걷기 운동을 하는 천변 길도 화려함과 건강함을 뒤로 한 채 휴식의 계절로 접어듭니다. 그 가운데 망초꽃 한 무더기가 피었습니다. 급하게 서둘러 핀 듯해 기특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합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다른 꽃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꽃 한 다발 받아든 기분입니다. 누군가 무덤가에 놓고 간 꽃다발 같기도 합니다. 숙연해집니다. 계절이 바뀌고 한해가 지나가는 모습을 봅니다. 그만 시들어도 좋으려만 여름 내내 무성하게 피었던 무리 중 무슨 미련이 남아 유독 저만 지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가을을 애도하는 꽃다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맞춰 친구의 부음을 듣습니다. 잠시 머물렀다 헤어집니다. 3 해가 퍼지는 아침나절이면 고양이 한 마리가 카페 앞에 덧깔아놓은 고무판을 발톱으로 긁어댑니다. 발톱을 다듭나봅니다. 쥐 한 마리 볼 수 없는 세상에 그렇게 발톱을 다듬어 무엇에 쓰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뚱뚱한 몸매로 보아 주린 것 같지도 않습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버르장머리겠지만 저것도 추억을 되살리는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밭을 매며 아버지를 추억하듯이... 고양이의 방문은 시간이 일정합니다. 그 시간에 커피를 내려 한 잔을 마십니다. 고양이는 젠장, 언제부터 커피를 마셨다고! 저 사람은 이 시간이면 커피를 내려 마시는 버르장머리를 버리지 못했군, 할지도 모릅니다. 슬며시 웃음이 납니다. 우리는 하루가 다 가도 다시 만나지 못합니다. 나는 카페에 앉아서 내 일을 하고 고양이는 어디에선가 제 일을 합니다. 내일 아침이면 만나게 될 것입니다. 뜨거운 커피잔을 놓았던 탁자에 둥근 무늬가 새겨지듯이 고양이가 긁고 간 고무판에도 고양이의 발톱 자국이 여기저기 남습니다. 4 해가 뉘엿한데도 뇌성마비를 앓아 반편이 된 삼당질이 사흘째 커피를 마시러 오지 않습니다. 혹시 내가 귀찮아하거나 홀대하는 눈치를 주지 않았는지, 몸이 아파 거동이 어려워진 것은 아닌지 궁금해집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성치 않은 이제 막 50이 넘은 삼당질은 돈을 내지 않고 커피를 마셔도 되는 줄 압니다.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차라리 오지 않은 한이 있더라도 삼당숙에게 커피값을 내는 법은 없습니다. 집성촌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을 탓한다면 그건 순전히 나의 잘못입니다. "서방님, 저걸 두고 어찌 눈을 감아야 하는지 요새는 잠이 안 와요." 죽음을 앞둔 삼종 형수의 이십여 년 전의 말이 귓전을 떠나지 않습니다. 5 나는 며칠 전 전철에서 만났던 여인이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건강한 여인을 건강치 못한 여인으로 잘못 보았다면 용서 바랍니다. 아무래도 핏줄이 툭툭 불거진 손등이 눈에 밟힙니다. 다 늦은 가을 들판에 소복하게 핀 망초꽃 한 더미도 제 풀에 스려진 다음 운동길에는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된소리가 내려 저절로 시들지 못하고 억지로 스러지면 왠지 슬퍼질 것 같습니다. 내일은 삼당질이 웃는 얼굴로 커페에 와 커피를 한잔 마시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팔촌 형수의 그 한마디가 나에게 남긴 유언처럼 귓전에 맴돌아 그의 삶을 거들지 못해도 커피는 대접해야 합니다. 내일 아침에 고양이를 다시 만나 안도하고 싶습니다. 고양이가 고무바닥을 긁지 않으면 그 버리장머리가 길들여놓은 나의 일상을 흐트러뜨릴 것 같습니다. 그것을 보는 것도 일상이 되었나봅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존재하는 자여서 그들이 없으면 존재의 의미를 잃고 맙니다. 매알 만나는 일상이 매일 새롭습니다.
[출처 더 수필] 일상 - 최호택
최호택의 **『일상』**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발견되는 미세한 감정의 떨림과 관계의 의미를 섬세하게 풀어낸 작품입니다. 작은 사건과 대상들을 통해 타인과의 연결, 삶의 연민, 그리고 일상적 아름다움을 조용히 성찰하고 있습니다.
주요 내용 분석
- 전철에서 만난 여인: 고독과 연민
- 여인의 마른 손과 푸른 핏줄은 작가에게 건강하지 못한 삶을 연상시키고, 막연한 연민을 불러옵니다.
- 여인의 모습을 슬프게 바라보는 시선은 일면 주관적이지만, 이는 타인에 대한 인간적인 공감입니다.
- “혹시 건강한 여인을 건강치 못한 여인으로 잘못 보았다면 용서 바랍니다”라는 문장은 자신의 감정이 빚어낸 편견일지도 모른다는 자각을 보여줍니다.
- 들판의 망초꽃: 한계와 애도
- 가을이 깊어지며 대부분의 식물이 시들어가는 와중에 홀로 핀 망초꽃은 한계와 미련을 상징합니다.
- 친구의 부음과 연결되면서 망초꽃은 누군가를 떠나보낸 후의 애도를 은유합니다.
- “때맞춰 친구의 부음을 듣습니다. 잠시 머물렀다 헤어집니다.”라는 표현은 삶의 유한함과 덧없음을 조용히 드러냅니다.
- 고양이와 카페: 일상의 리듬
- 고양이가 매일 같은 시간 카페 앞에서 고무판을 긁는 모습은 일상의 반복과 그로 인한 안정감을 상징합니다.
- 작가는 고양이의 습관에서 자신의 일상을 되돌아보며, “추억을 되살리는 방법”으로 받아들입니다.
- 고양이의 발톱 자국처럼 작가의 삶에도 일상의 흔적이 남습니다. 이러한 반복은 지루함이 아니라 삶의 소소한 의미로 자리 잡습니다.
- 삼당질: 공감과 책임감
- 뇌성마비를 앓는 삼당질의 부재는 작가에게 걱정과 죄책감을 불러일으킵니다.
- 커피 값을 받지 않는 것은 “집성촌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는 공동체의 유대와 공감의 윤리를 드러냅니다.
- 작가가 삼당질을 배려하며 그를 기다리는 모습은 인간 관계에서의 따뜻한 책임감을 보여줍니다.
- 반복되는 일상의 가치
- 작가는 일상을 이루는 대상들이 없으면 자신의 존재 의미마저 흐트러진다고 고백합니다.
- 매일 반복되는 작은 일상—여인의 손, 망초꽃, 고양이의 발톱질, 삼당질의 방문—이 작가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 “매일 만나는 일상이 매일 새롭습니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일상 속에서 발견되는 끊임없는 새로움과 감동을 강조합니다.
작품의 주제
- 소소한 일상 속의 연민과 공감: 작가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대상들에 연민을 느끼고 그들의 존재를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 삶의 유한함과 애도: 들판의 망초꽃과 친구의 부음은 인생의 덧없음과 그에 대한 애도의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 반복되는 일상의 의미: 일상의 사소한 습관과 만남은 안정감을 주며,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문학적 감상
최호택의 『일상』은 지극히 평범한 하루 속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과 감정을 조용히 담아냅니다. 그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람과 풍경, 사물에 대한 섬세한 시선으로 우리에게 관계의 소중함과 소소한 삶의 의미를 일깨웁니다.
“매일 만나는 일상이 매일 새롭습니다.”
작가는 반복되는 일상에 무감각해지지 않고, 그 속에서 늘 새로운 의미를 찾아냅니다. 일상이 새롭다는 깨달음은 곧 존재의 아름다움을 아는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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