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의 것 / 주민현
역을 나오면서
호두과자와 땅콩과자 냄새가 좋아
엄마 생각이 난다
호두와 땅콩은 닮았고
땅콩은 호두와 불화해
종이봉투 안에서
불온전한 김이 솟는다
이런 추운 날엔 다정한 불화가 좋아
세상의 불행은
불운한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게 만들고
세상은 불의로 굴러가지
입속에서 여러번 구르며 잘게 부서지는 것
나는 쪼그려 앉아 호두를깼을,
땅콩 껍질을 벗겼을
어떤 사람의 모습을 상상한다
호두, 누군가 심기로 결심하고 상상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지금 내 나이보다도 일찍 엄마가 되었고
여전히 나의 하루를 궁금해하는 사람
엄마가 떠나고
나도 떠난 세상을 종종 그려보면
그것은 또 그것대로 좋을지도
호두의 전부를 안다는 것
그것은 호두의 고통을 껴안아본다는 것
단지 이 호두를 쥐고
손이 차가운 사람에게 가고 싶다
이 호두는 나무에 잘 매달려 있었겠지
햇빛과 바람과 폭우를 맞았겠지
그리고 지금은 봉투 안에 따뜻하게 담겨 있다
호두는 슬픈 사람의 자세야
왠지 그런 생각이 든다
[주민현 '멀리 가는 느낌이 좋아' 창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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