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이끌고 가야지 / 임영숙
한 그루 나무에서
만 그루의 어둠이 살아
벌레 먹은 나뭇잎
그 사이로 별이 떴다
가을은 붉은 내력을 벗은
불꽃들의 집합체
맺혀있는 물방울에
무지개도 걸리고
근육질 가지마다
보석이 반짝인다
자신의 뿌리 끝 영혼을
향해 가는 순례의 시간
(시조집 ‘들판 정치’, 작가, 2024)
[시의 눈]
집 앞 운암산엔 밤나무 숲이 있습니다. 잎이 한창일 때를 보내고 이제 나무들은 밤송이를 다는군요. ‘근육질 가지마다’ 청솔루 몰래, 하지만 들통날 알밤을 싣습니다. 마침 그늘에 앉아 베토벤 교향곡 6번을 듣습니다. 내려다뵈는 동네가 보랏빛으로 바뀔 때군요. 낙엽 깔리는 서정을 밟듯 노을의 고요가 구슬풀 밭 여뀌꽃에도 묻어옵니다. 비발디의 가을악장을 위해 난 굴참나무밭으로 왔습니다. 내쳐 페티김 ‘9월의 노래’도 듣고 가야겠네요. 이제 키 큰 호두나무 앞에 걸음을 멈춥니다. 나무의 삶이 내 뿌리로 가는 순례처럼 여겨지는 시간이지요. 하면, 장차 힘을 예비하듯, 책읽고 글쓰고 음악듣는 일, 그러니까 제 본분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올해의 그 징한 폭염에도 ‘불꽃들의 집합체’를 만드는 결실의 권리가 자기도 ‘이끌고 가야지’하며, 내 붉은 시창(詩窓)을 두드립니다. 임영숙 시인은 경기 용인에서 나, 2014년 ‘나래시조’ 신인상 등단, 시집 ‘풀잎의 흔들림이 내게 건너왔으니’(2020)를 펴냈습니다. 그는 사물 안팎의 궤적을 되밟으며 내밀한 사물의 기미(幾微)를 짚어내는 시인입니다.
<광주매일신문 노창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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