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저수지 / 이설야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4. 6. 20. 12:48

저수지 / 이설야

 

검은 파도를 바라보며

내가 빠뜨린 봄을 천천히 마신다

물안개처럼 흩어지는 얼굴들

 

어둠을 말아놓은 종이컵처럼

쉽게 구겨지는 마음

찢어지는 싫은 마음

 

컵의 안쪽은 뜨겁고 시끄럽다

 

생각은 흘러간다

없어지는 것 같다가

더 많이 나에게 달라붙는다

나인 것처럼

달라붙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다

 

검은 숲과 새들이 몰려오고

별들이 지나가다 빠지고

바람은 축축하게 젖어 더러워졌다

 

내가 손을 놓친 그림자들

다 쓰지도 버리지도 못한 어제의 얼굴들

물풀처럼 서서히 떠오른다

 [이설야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창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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