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바다비누 / 강지이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4. 6. 18. 15:05

바다비누 / 강지이

 

그때 바닷빛은 너무 밝았다

 

해변에서 웃으며 개와 달리는 아이들

사진을 부탁한 연인이 뒤돌아올 때

하늘 위로 저만치 날아가는 밀집모자와

누군가가 건물 위에서

바다로

날리는 종이비행기

 

눈이 부시네

 

그런데 이건 너무 영화 같은 기억이라면,

좀더 이 앞의 장면들을 생각해보자

 

우리를 괴롭힌 인간보다

우리는 반드시 오래 살 거야

 

그러니 우리

일어나지 않은 일에 더이상

얽매여 슬퍼하지

않도록 하자

 

아니 아니, 이 장면 앞에는

이런 모습들이 있었다

 

이래서는 너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어

바닷속에 손을 넣으면 내손이 그냥 이대로

녹아 사라져버렸으면 해

 

파도가 요란하다

 

테이블 위 물컵이 모서리에서 자꾸만

 

 

  꾸

 

    만

 

흔들린다

 

이 장면 뒤에는 또 무슨 장면이 있었지?

 

밤바다 옆 보도를 함께 걸었다 가로등 불빛이 너무 밝아 무수한 벌레들이 저마다 반짝이고

여름 바람이 얇은 우리의 옷 사이사이를

통과한다

 

마른 손을 쓰다듬고

이마를 맞추었다

 

우리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벌레들이

계속 궤도를 그리며 움직이고

 

눈이 부시네

 

그런데 어떤 기억들이 슬퍼서 견딜 수 없었던

그런 장면들도 있지 않아?

 

별 도움 되지 않는 그런건 잊어버렸어

 

아직도 마른 가지와 같은 손가락으로 너는

책상을 두드리다 말한다

 

점심시간이네?

 

밝지 않은 밖으로

우리는 손을 잡고

 

점심을 먹으러

나간다

 

점심을 맛있게 먹을 것이다

 [강지이 '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려고' 창비 2021] 

728x90

'글쓰기 공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빗길 / 이동우  (0) 2024.06.20
저수지 / 이설야  (0) 2024.06.20
유월의 저녁 / 서정홍  (0) 2024.06.17
모르는 사람 / 김승희  (0) 2024.06.17
청송 / 이영광  (0) 2024.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