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비누 / 강지이
그때 바닷빛은 너무 밝았다
해변에서 웃으며 개와 달리는 아이들
사진을 부탁한 연인이 뒤돌아올 때
하늘 위로 저만치 날아가는 밀집모자와
누군가가 건물 위에서
바다로
날리는 종이비행기
눈이 부시네
그런데 이건 너무 영화 같은 기억이라면,
좀더 이 앞의 장면들을 생각해보자
우리를 괴롭힌 인간보다
우리는 반드시 오래 살 거야
그러니 우리
일어나지 않은 일에 더이상
얽매여 슬퍼하지
않도록 하자
아니 아니, 이 장면 앞에는
이런 모습들이 있었다
이래서는 너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어
바닷속에 손을 넣으면 내손이 그냥 이대로
녹아 사라져버렸으면 해
파도가 요란하다
테이블 위 물컵이 모서리에서 자꾸만
자
꾸
만
흔들린다
이 장면 뒤에는 또 무슨 장면이 있었지?
밤바다 옆 보도를 함께 걸었다 가로등 불빛이 너무 밝아 무수한 벌레들이 저마다 반짝이고
여름 바람이 얇은 우리의 옷 사이사이를
통과한다
마른 손을 쓰다듬고
이마를 맞추었다
우리의 머리 위에서 반짝이는 벌레들이
계속 궤도를 그리며 움직이고
눈이 부시네
그런데 어떤 기억들이 슬퍼서 견딜 수 없었던
그런 장면들도 있지 않아?
별 도움 되지 않는 그런건 잊어버렸어
아직도 마른 가지와 같은 손가락으로 너는
책상을 두드리다 말한다
점심시간이네?
밝지 않은 밖으로
우리는 손을 잡고
점심을 먹으러
나간다
점심을 맛있게 먹을 것이다
[강지이 '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려고' 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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