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시 창작 강좌> 제121강
■ 애매모호한 시와 주제가 확실한 시
시단에서 이름이 꽤 알려진 모 시인이 시인들의 모임 후 뒤풀이 장소에서 자기의 시론을 장황하게 펼쳤는데 그는 “시가 애매모호한 부분이 많을수록 더 좋은 평가를 받는다”면서 자기는 “될 수 있으면 애매모호하게 표현하는 방법으로 시를 써서 발표 한다”고 했다. 술잔이 몇 순배 돌았고 혼자 다 아는 척 떠들기에 말을 섞지는 않았지만 그의 시론은 기본 전제부터 잘못 되었기에 틀렸다는 생각을 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애매모호한 것을 쓴다는 것은 시에 대한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시는 될 수만 있다면 일상의 용어가 아닌 새로운 표현, 비유와 상징을 통하여 참신성을 확보하라고 이 강의에서 몇 번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다 말하면 설명이 되므로 반만 말하라고 했는데 이것을 오해하여 무엇을 말하려는지 분명하지 않거나 애매모호하게 써라는 말로 해석하면 시를 망치게 된다. 주제가 실종된 시는 중언부언(重言復言)하는 넋두리나 난해한 시 축에도 들지 못하는 비시(非詩)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주제는 화자가 말하고 싶은 내용이다. “내용이 없는 시는 빈 깡통이다”라는 생각으로 시를 쓰기 바란다. 다만 그 내용을 다 드러내지 말고 반만 말해도 시를 읽는 독자는 그 말을 해석해 낸다. 독자가 시를 감상한다는 것은 시의 주제를 이해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시는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해 보자.
봉투를 열자 전갈이 기어 나왔다
나는 전갈에 물렸다
소식에 물렸다
전갈이라는 소식에 물렸다
그로부터 나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빙그레 웃곤 하였다
축축한 그늘 속 아기버섯도 웃었다 곰팡이들도 따라 웃었다
근사하고 잘생긴 한 소식에 물려 내 몸이 붓고 열에 들떠 끙끙 앓고 있으니
아무튼, 당신이 내게 등이 푸른 지독한 전갈을 보냈으니
그 봉투를 그득 채울 답을 가져오라 했음을 알겠다
긴 여름을 다 허비해서라도
사루비아 씨앗을 담아 오라 했음을 알겠다
- 류인서, <전갈> 전문
류인서 시인의 시는 보통 두 번 정도 읽어보면 그 뜻이 잡힌다. 그러면서 무릎을 치게 된다. ‘'봉투를 열자 전갈이 기어 나왔다’'고 했는데 이 전갈은 독충 전갈이 아니라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인 ‘소식’이라는 말이다. 그 전갈은 사랑의 고백이었으므로 ‘'그로부터 나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 빙그레 웃곤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축축한 그늘속의 아기버섯도'’ 심지어는 '‘곰팡이들도 따라 웃었다'’고 했다. 시의 화자는 지금 “어둡던 현실 끝, 사랑의 시작”을 말하고 있다. 등이 푸른 지독한 사랑의 전갈에 물린 듯하다. ‘'긴 여름을 다 허비해서라도 / 사루비아 씨앗을 담아 오라 했음을 알겠다’'고 했는데 ‘사랑’이라는 말의 어감이 묻어나는 큰 깨꽃인 사루비아를 통해 깨알 같이 꽃피는 사랑! 행복이 가득한 사랑을 준비하자는 뜻으로 읽힌다. 통속으로 흐를 수 있는 '사랑'이라는 주제를 이렇게 표현할 수만 있다면 사랑시도 촌스럽지 않겠다.
류인서 시인은 시 전문지 계간<시와 편견> 편집진에 합류하게 된 중견 시인 7인 중의 한 사람이다. 앞으로 편집진과 공동주간, 고문으로 참여하는 시인들의 시를 매주 소개할 예정이다. 그리고 기쁜 소식은 계간<시와 편견> 사무실을 서울 종로구 율곡로변 오피스텔에 지난 화요일 마련했다. 계간으로 정기간행물 등록 신청도 했고 국내 어느 시 전문지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한 고문과 공동주간, 그리고 시단에서 시 잘 쓰기로 유명한 시인들로 편집진을 꾸렸다. 때가 되면 발표를 할 것이지만 올 가을에 발행되는 <시와 편견>은 기대해도 좋을 것이고 시사모 회원들에게 큰 자긍심이 될 것이다.
<시와 편견> 고문으로 수고해 주시기로한 유안진 시인의 시도 한 편 살펴보자.
그림자도 반쪽이다 / 유안진
편두통이 생기더니
한 눈만 쌍거풀지고 시력도 달라져 짝눔이 되었다
이명도 가려움도 한 귀에만 생기고
음식도 한쪽 어금니로만 씹어서 입꼬리도 쳐졌다
모로 누워야 잠이 잘오고 그쪽 어깨와 팔이 자주 저리다
옆가리마만 타서 그런지 목고개와 몸이 기울어졌다고 한다
기울어진다는 것
그리워진다는 것
안타까워진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아프고 아픈 것
아픈 쪽만 내 마음도 반쪽만 내 것이구나
그림자도 반쪽이구나
그런데 나머지 반쪽은 누구지?
유안진 시인의 시는 우선 난해하지 않다. 서울대 교수직을 퇴직하고 나서 발표한 시들은 더 쉬워졌다. 그러나 상투적이지 않다. 상식과 통념을 뒤집어 보는 그만의 시각으로 인생의 진리를 찾아낸다. 위의 시에서 보듯 인생의 반은 내 것이 아니라는 화두는 독자의 생각 공간을 넓혀 준다. ''아팠던 것만 내 것''이고 그림자도 반쪽만 내 것이라는 고백은 인간이기에 저지르게 되는 잘못이나 우유부단했던 삶의 여정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다.
시는 우리의 사람살이와 멀리 있지 않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에 있고 자잘한 일들이 모여 시가 되고 그 시가 모여 인생의 기록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될 것은 시가 아니래도 들을 수 있는 교훈적인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교훈적, 지시적, 확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독자의 생각 공간이 있는 방법으로 뒤틀어서 말한다, 그것이 시다.
오늘은 위의 내용과 연관 지은 비유의 방법 세 가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강의를 마무리 할까 한다.
1. 비유를 많이 하지 말고 적재적소에 맞는 것을 골라서 하라.
(비유를 많이 하면 주제가 산만해질 수 있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2. 근본비교부터 하는 연습을 하라.
(김동명 시인의 파초를 읽어 보라. 파초(바나나 나무)=남쪽 나라에서 온 여인, 뿌리=발등, 잎=드리운 치맛자락 등이 근본 비교다. 이는 시 쓰기의 기본이다.
3. 금기에서 자유로워라.
(말 못할 비밀, 하찮게 생각했던 것들을 화자를 동원하여 자유롭고 솔직하게 말하되 직설인 아닌 비유와 상징을 동원하라)
- 이어산, <생명시 운동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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