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시 창작 강좌> 제110강
■ 시적 대상과 확장성에 관하여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면 존경할만한 어른이 별로 없다는 탄식을 듣게 된다. 편 가르기와 진영논리, 내편이 아닌 상대편은 설사 옳은 이야기를 해도 반대의견을 내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한 번 우리편이 아니라는 낙인이 찍히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우리 사회를 통합하거나 아우를 수 있는 존경받는 어른이 되기가 힘든 구조가 점점 고착화 되어가고 있다. 이 참담한 상황은 우리 시단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시를 잘 쓰는 사람으로 이름이 꽤 알려진 시인도 자세히 보면 삶의 이력에 흠결이 있거나 인간성을 의심 받기도 하고 사람은 참 좋은데 시의 질이 그 사람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문단의 권력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내편에 서지 않으면 상대를 별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세상을 살다보면 시와 삶이 같이 가기는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나의 생각과 조금만 달라도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기의 신발에는 흙도 묻히지 않고 사는 것 같이 함부로 남을 평가하지만 사실은 오십 보 백 보이거나 자기가 손가락질 한 대상 보다도 자기는 훨씬 못난 경우가 많다. 속이 꽉찬 사람은 남에게 함부로 손가락질 하지 않는다.
나는 시사모를 통해서 좋은 독자나 시인이 많이 나오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그것은 나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회원들이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고 댓글 하나라도 진정성 있게 달아줄 수 있어야 될 일이다. 되는 집안은 좋은 것, 희망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콩가루 집안은 부정적인 것 부터 찾아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시가 되는 사람은 대체로 세상을 긍정적으로 넓게 본다. 그러나 시보다도 인간관계에 관심을 둔 사람은 약간의 바람만 불어도 시를 포기해 버린다. 부처님이 아니라 스님을 보고 절에 다니거나 하나님이 아니라 목사님을 보고 교회에 다닌다면 스님이나 목사님이 인간적으로 조금만 실수를 해도 믿음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오늘은 시가 되도록 하려면 어떤 대상을 어떻게 선택하여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시인은 대상을 통찰(通察/insight)하는 것에서 부터 출발하여야 한다. 시를 쓸 때 시가 잘 안 된다면 관찰(觀察/observation)은 열심히 했는데 통찰이 안 되는 경우가 아닌지를 살펴봐야 한다. 관찰과 통찰은 근원적으로 다르다. 관찰은 대상을 객관적,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라면 통찰은 내면의 세계를 직관으로 들여다 보는 것이다. 대상을 이해하고 서술하거나 묘사한 것은 관찰의 영역이다. 관찰은 그래서 논리적이거나 객관적 사실을 발견하는데 유용한 과학적인 것이라면 통찰은 비논리적 의미와 주관적, 존재론적 진실을 밝히는데 유용한 정서적 사유다. 자세히 보는 것은 관찰이지만 내 생각을 넣어서 눈앞의 현상이 아니라 그 너머를 보는 것이 통찰이다. 그래서 시 짓기는 통찰을 통해서 얻은 깨우침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통찰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선 통찰을 구성하는 중요요소가 상상력임을 기억하자. 상상력이란 어떤 논리를 초월한 주관적 사고(思考)로 정의 된다.
'다 지으시고 마지막 날에 제6일에
사람을 지으시다'
그러므로 말째야
대자연의 6분의 1에 지나지 않으며
맨 끄트머리 말석이 네 차례야
물과 흙과 돌멩이...하루살이까지도
앞서 태어나신 형님들이시고
가장 마지막 끝날 순간에
말째로 지으신바 사람아
가장 잔인하고 흉물스런 짐승아
- 유안진, <사람>전문
조물주가 세상을 만드실 때 맨 마지막으로 인간을 지었다고 한다. 물과 흙과 돌멩이... 하루살이까지도 인간 보다 앞서 태어나신 형님들이며 이 세상의 말석이 인간의 자리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자연을 자기들의 소유물인양 함부로 훼손하는 가장 잔인하고 흉물스런 인간에게 시인은 경고장을 던진다. '자연을 보호하지 않는 민족은 내일을 논할 자격이 없다'는 메시지와도 같다.
이처럼 시의 내용이 가벼운 것 같으면서도 우주적 질서를 직관한 통찰력의 산물이 '자연이 형님'으로 확장 되었지만 억지스럽지가 않다. 시적 논리란 이처럼 과학적 진리가 아니라 이성과 논리를 초월하는 자신의 존재론적 상상력을 열어서 억지스럽지 않은 다른 어떤 진리를 발견해 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적 대상'은 어떻게 확보해야 될 것인가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시적 대상(시의 발상)은 구체적이거나 특수한 것이 유리하다. 보통명사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구체적이거나 독특한 고유명사로 시적 사고의 영역을 확장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서 '사람' 보다는 '여자' '여자'보다는 '눈망울이 호수 같은 소녀'-->'눈망울에 호수를 담고 있는 소녀는 파리한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라는 식으로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거기에 나와의 연관성을 강하게 넣으면 나의 색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시가 된다. 또한 '나무'를 대상으로 시를 쓰더라도 구체적인 이름을, 그 이름에 걸맞은 상황을 그려 넣는 연습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그냥 '나무'가 아니라 '우리 동네 나이와 같은 팽나무, 팽이같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걸어 놓고'라는 식으로 사고(思考)를 확장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기억해야할 것은 꼭 필요한 말만 가려서 넣는 일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수는 없으므로 산문처럼 길게 써놓고 정원사가 가지치기를 하듯 덜어내는 작업을 해야한다. 이것이 퇴고다.
푸르고 푸른 줄 알았단다.
푸르고 푸른 것이 그치면
복사꽃 외야꽃 냉이꽃
향기로운 꽃밭인줄 알았단다.
바다!
바다!
구슬 같은 눈물이 희기 시작한다.
두 손을 흔들어 사무친 이름을 불러보면
물결이 더욱 하늘처럼 영롱하다.
물결은 가슴 밖을 하늘처럼 넘쳐흐른다.
바람이 흔들면
거문고 일곱 줄 하늘마저 울린다
- 김춘수, <여자>전문
이 시의 제목이 '여자'이므로 시적 대상이 여자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여자'가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꽃밭' 또는 '바다'가 등장한다. 김춘수 시인의 시에서 흔히 나타나는 상식을 깨는 시작법이다. 이것이 좀 더 진화하여 무의미의 시로도 발전한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하지 않는 자기만의 독특한 의미로서의 여자를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의 인습적이고 일상화된 의미에서 벗어나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때 얻어질 수 있는 세계다. 아름답거나 어머니로서의 여자나 사랑의 대상처럼 통속적인 것을 뛰어넘는 시적 대상을 통찰하는 시안(詩眼)이 열려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다. 초보시인이 이렇게 썼다면 억지스러운 것으로 치부될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걸어온 시력(詩歷)이 쌓이고 쌓이면 광활한 시의 바다를 마음대로 헤엄칠 수도 있다.
- 이어산, <생명시 운동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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