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제104강 시인과 시 정신

귀촌일기 박뫼사랑 2017. 12. 25. 12:30
<토요 시 창작 강좌> 제104강

   ■ 시인과 시 정신

   시라는 말에는 본래 무엇인가를 최초로 창조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서양시학의 출발은 성경의 시편이나 아가서 등을 꼽는데 성경 헬라어 원전에는 시를 가리켜 '포이에마(Poiema)'라고 했다. 이것은 '최초로 만들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시는 '새로운 글'에 다름아니다.
   새롭게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다. '무엇을 보는 것'은 산문이고 '어떻게 보는 것'은 시 이므로 '무엇'과 '어떻게'는 시와 산문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 즉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나 한용운의 <님의 침묵>등 개개의 시 작품은 보통 명사로서의 시(포엠Poem)라고 한다. 그런데 넓은 의미에서 시를 아우르는 진정한 시는 시 정신(詩精神)이 포함된 시(포에트리Poetry)를 말한다. 그러므로 시(Poem)에는 시 정신(Poetry)이 녹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시 뿐만이 아니라 음악과 무용, 그림과 조각 등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모든 예술 작업에는 본질적이며 핵심적으로 뒷받침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새로움의 창조라는 '시 정신"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좀 더 깊은 의미에서의 시 정신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난주 강의에서 나는 "시는 아름다운 말을 하기 위해서 쓰고, 시를 읽는 것은 아름다운 말을 배우기 위해서“라고 설파한 적이 있다. 원래 시의 갈래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시대상황에 따라서 시도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난해하거나 실험적인 시, 심지어는 해체 시나 무의미의 시라는 것까지 등장하여 시를 난도질 하는 바람에 시가 독자에게 안겨주었던 잔잔한 감동은커녕 시를 읽을수록 혼란스러워서 독자들이 시에서 오히려 멀어지는 부작용이 속출하였던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시의 외연확대와 발전을 위해서 실험적이거나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시의 본류인양 난해하거나 이상한 시를 좋은 시라고 내어놓는 일부 평론가와 시인들이 시단의 흐름을 장악하는 것에는 심각한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를 '붉은 닭의 해'라고 하여 오랜 세월동안 우리와 함께해 온 닭을 기리는 해이다. 옛날부터 닭은 땅에서 키웠지만 지금은 대규모 양계농장에서 땅을 제대로 밟아 보지도 못한채 사육되는 것이 보통이다. 닭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환경의 변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닭이 돼지소리를 내면 되겠는가? 환경이 변하여도 닭은 닭소리를 내야한다. 이것이 순수성이라는 것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하여도 시가 지닌 본래의 순수성을 잃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시의 순수성란 시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모든 시인이 일류가 될 수는 없다. 모든 시가 명작일 수 없듯이, 문제는 시인 자신에게 있다. 열심히 쓰고 즐기면 될 일이다. 다만 쓰고 즐기려면 그 방법을 배우고 닦아야 된다. 시는 오래 전부터 시다운 시만 전승 계승되어 왔지 엉터리 시는 곧 소멸해 버린다. 시다운 시란 결론적으로 말해서 너는 너다운 시를 써란 말이고 나는 나다운 시를 써자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색깔이 있는 시로 우리의 사람살이를 의미있게 하고 나에게나 당신에게 치유가 되며 시를 읽는 사람에게 공감과 감동을 주는 시를 써보자는 것이다. 이것이 이 강좌가 추구하는 <생명 시 운동>의 핵심이다.
   하나마나한 뻔한 이야기도 나의 손길을 거치면서 '어떻게' 새로운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훌륭한 시로 탄생할 수 있다. 이것을 깨닫고 내 것으로 체화가 된다면 당신도 훌륭한 시인의 반열에 들어설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포엠 러브리스(Poem Lovers)'라 하지 않고 '포에트리 러브리스(Poetrey Lovers)'라고 하는 의미를 항상 생각할 필요가 있다.

   . - 이어산, <생명 시 운동 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