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제93강 현실 참여시와 치유의 시

귀촌일기 박뫼사랑 2017. 12. 25. 12:20

<토요 시 창작 강좌> 제93강

현실 참여시와 치유의 시

   우리는 지금 복잡하고도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가는 일도 힘드는데 작금의 현실은 우리의 대통령이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분란의 중심에 있기에 국민은 더욱 허탈감에 빠졌고 불안감은 고조되고 국격이 훼손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다. 이런 기막힌 현실을 정치적인 것으로 치부하여 시인들은 외면하거나 침묵하는 것이 과연 미덕일까?
   4.19와 민주화 과정을 거쳐오면서 사회현실에 대한 비판과 고발, 그리고 불의에 저항하는 시인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시를 통하여 직접, 혹은 풍자와 반어의 기법으로 저항의식을 드러냈는데 김지하 시인의 '오적'과 '타는 목마름으로', 고은 시인의 '화살'과 김수영 시인의 '풀',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 등이 대표적인 것으로 기억된다. 시단의 치열한 논쟁이 있었으나 사회적 현실에 대한 실천성을 중시하는 참여시의 성행은 시의 본질인 순수성과 예술성이 훼손된다는 이유로 배척 받기도 했다. 그러나 '시인은 시대의 증인'이라는 역사를 무시하는 것 또한 편협한 사고가 아닐 수 없다. 순수시만 시라고 우길 수 없는 것은 부조리한 사회현실에 마냥 눈을 감거나 시대의 아픔을 모른체하는 것 자체가 비겁한 일이기에 시인이 '시대의 양심'으로 사회에 바른말을 시적으로 표헌하는 것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데에 나는 동의하는 입장이다.

   지난주에 우리 밴드에는 현 시국에 대한 몇 건의 현실 비판시가 올라왔다. 일부 회원은 그 시의 내용에 동조하기도 하고 일부는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우리 밴드의 운영규칙엔 정치적이거나 논란이 될만한 사상적인 것, 종교적인 색채가 뚜렸한 것은 올리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직설적인 선동이나 사상적 편향성이 없는 시적 표현까지 막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확대해석으로 논란이 일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정말 불필요한 시간 낭비다. 나는 그 정도의 글도 용인되지 않는다면 우리 밴드는 시의 다양성을 가로막는 폐쇄적이자 편협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전락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국민의 대다수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이런 때에 시대의 아픔을 지적하는 시 한 편도 올릴 수 없다면 우리 밴드는 영혼없는 밴드에 다름 아닐 것이다. 다만 어떻게 그것을 표현하느냐는 것이다.
   다음의 시는 계간 <열린시학> 겨울호에 특집 '열린시학이 주목하는 시인'란에 실린 필자의 졸시 중 한 편이다.

   입소문에 끌려서 
   악명 높은 주술사를 만났다
   나도 모르는 새 고즈넉한 최면술 속으로 빨려 들었다
   전생은 견고하고 찬란했고
   어떤 곳은 소실되어 폐허였지만
   과거보다 궁금한 미래로 향하려하자
   전생으로 미래를 추측할 수 있다는
   주술사의 최면은 유효하다

   말과 행동을 끌어모아 천칭(天秤)에 올려본다
   행동은 무거운데 말이 가볍고
   행동이 가벼우면 말은 납덩이
   아, 말과 행동이 그네를 타다가
   가벼운 말은 최면술 속에 숨고
   무거운 행동이 바깥을 기웃거릴 때
   방언이 터져 지진을 일으킨다

   쓰나미는 방파제를 넘고
   푸르던 집은 무너질 듯 아슬한데
   주어와 술어가 어긋난 땅
   오타가 많았던 믿음
   모두 수정하고 싶은데
   고약한 냄새로 만질 수가 없다

   편견과 비굴에 길들여졌던 나의 말과 행동
   미래여 책임지라 오만을 기록하는데
   내 떠나거든 묘비명에
   ''오만과 편견으로 비굴하게 살다가 가노라''고
   적어라.

   - 이어산, <말과 행동의 질량> 전문


   시는 내적 고백을 지향하는 문학양식이다. 그러나 참여시는 주관적 내면의 고백이 아니라 객관적 사회 비판이 우선되기도 한다. 그 고백들은 독자의 정서와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때로는 이질감이나 거부감을 주기도 하지만 시의 구성요소가 어떠한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감정의 절제없이 선동, 선전을 위한 것일 때는 시가 아닌 것이다. 참여시라도 과도한 감정의 발설이나 사건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절제와 함축을 통한 내면의 응결된 감정을 드러낸 것이라면 시로서의 생명력을 갖게 된다.
   위 졸시도 세간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대통령과 관련된 부끄러운 일들의 원인 제공자는 바로 '나'라는 고백이다. 그것은 '오타가 많았던 믿음'이었고 편견과 비굴에 길들여졌던 '나'로 지칭되는 지식인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에둘러 말하고 있다. 쉽게 말하지 못했던 말들은 '방언처럼 터져 지진을' 일으키는데 어떤 이미지를 연상케 하는 '말과 행동이 그네를 탄다'든지 ''오만과 편견으로 비굴하게 살다가 가노라''고 '묘비명에 적어라'는 자탄의 이미지로 확대되어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참여시라도 이처럼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으로 쓰되 시적 구성요소를 벗어나면 격문이나 선동, 선전문에 다름 없게 된다는 점에서 주의할 일이다.

   진정한 시인이란 이 세상에서 인생의 참된 가치와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아가는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이다. 그리고 시를 읽으려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시가 자신의 영혼을 맑게하고 기분을 좋게하며 내용에 공감하여 결국 행복해지기 위한 목적으로 읽는다고 봐야한다. 시를 읽고나서 더 우울해지거나 화가 나거나 혼란스럽기 위해서 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눈만 뜨면 언론에선 새로운 비리의 폭로와 누가 어떻게 나랏돈을 빼먹었는지 등 우울한 소식으로 가득하다. 광화문으로 달려가서 세상을 울리는 북이라도 치고싶다. 그러나 여기에서 생각해 봐야할 일이 있다. 시를 쓰는 사람까지 계속해서 분노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아니다. 불행한 일이다. 시를 쓰는 사람은 시로 말해야 된다. 그것도 타도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상대를 향한 시가 아니라 '이지경이 되도록 나는 어떻게 그들을 도왔었고 살아왔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져야 한다. 세상 모든 일은 나를 중심으로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 시인의 눈이다.
   이젠 우리는 위로가 되고 치유가 되는 글을 써야할 사명이 있다. 이것은 우리 밴드가 추구하는 생명시 운동의 이념이기도 하다. 진정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젠 냉정해져야 한다. 무엇이 나와 나라를 위한 길인가를 한 번 더 생각하고 행동할 일이다. 종주먹질로 성토하고 분노의 촛불을 드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전쟁터에서도 야전병원의 의사처럼, 간호사처럼 시로 치유하는 사람이다. 모두가 전투만 한다면 오히려 싸움에서 진다. 누군가는 상처입은 사람에게 치유가 되는 행동도 해야 될 게 아닌가? 세상은 강한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순한 사람이 이긴다. 너무 강하면 부러지고 쥐도 궁지에 몰리면 사람을 문다. 강대강(强對强)의 대결 구도로는 오히려 해결을 더 어렵게 한다. 우리만이라도 이젠 부드러워지자, 순해지자, 위로와 치유의 시를 써보자.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이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시집<이 시대의 아벨>에서

   - 이어산, <생명 시 운동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