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시 창작 강좌> 제94강
■ 언어 산책과 시 쓰기
시는 언어의 산책을 많이 해본 사람이 제대로 쓸 수 있다. 산책이란 천천히 주변의 풍광과 자신의 호흡을 맞춰가며 음미하면서 걷는 것이다. 음미한다는 말은 즐긴다는 말과도 같다. 소설을 읽는 일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일이라면 시는 호젓한 오솔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소믈리에처럼 그것을 음미하며 즐기는 일이다.
인생의 길을 바쁘게 걷거나 뛰어다녔던 사람도 길을 천천히 걸어볼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누가 그러고 싶지 않아서 그러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여유는 살아가는 형편과 관계없이 마음먹기에 달렸다. 이 밴드의 아무나 붙들고 물어보라. 한가하거나 시간이 남아서 시를 가까이 하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을 것이다. 바쁜 삶의 현장에서도 짬을 내어 글 한 줄 쓰고 시 한 편 읽는 것이 바로 인생의 오솔길을 산책하는 일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걸어온 길을 되돌아 보게 되고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많은 것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다. 시란 우리가 그동안 무관심하게 스쳐 지나간 것들을 발견하는 것이고 살아온 길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이다.
누구도 핍박해 본 적 없는 자의
빈 호주머니여
언제나 우리는 고향에 돌아가
그간의 일들을
울며 아버님께 여쭐 것인가
- 김사인, <코스모스> 전문
이 시는 그냥 스치면서 봐 온 코스모스의 흔들림과 가냘픔에 눈길(묘사하기)을 주었고, 삶의 의미를 되돌아 보게 하는(진술하기, 사유넣기) 시다. 서양의 전설에는 코스모스는 창조주가 만든 꽃 중에서 제일 먼저 만드는 바람에 실패한 꽃이라고 한다. 잎도 줄기도 가냘프고 꽃도 홑잎,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꽃이다. 그래서 코스모스는 원래 꽃말이 없다. 시인은 이것을 모티프로 했나보다. '누구도 핍박해본 적 없는 자의/빈 호주머니'는 그래서 더욱 실패한 밑바닥의 설움이 묻어나고 있다. 그런 자식이라도 아버지는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혈육과 고향에의 그리움이 짙게 베인 이 시는 나이가 좀 들고 눈물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은 더욱 정서적 울림으로 다가올 것이다.
시는 읽은 양이 아무리 많아도 그 시 속으로 산책하지 않았다면 안 읽은 것과 마찬가지다. 제대로 산책을 해본 사람은 그 길을 잘 안다. 그리고 그 길엔 무엇이 있으며 새가 지저귀는지 어떤 꽃이 피고 지는지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시는 시의 오솔길을 제대로 산책해본 사람(제대로 된 독자)이 쓸 수 있다. 그것은 독서의 양이 아니라 독서의 질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가 쓴 시의 양으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밀도와 질로 승부한다. 이 말은 짧거나 긴 시에 관계없이 언어를 얼마만큼 적재적소에 배치했으며 내용이 나와 어떤 고리가 있으며 공감하거나 감동을 줄 수 있는 시를 썼느냐의 문제와 연결된다.
화분을 들어 옮기는데
올라온 꽃송이가 그의 이마로 내 목을 쓰윽
밀고 있다
성냥개비다 잠자던 감각의 끝에 불똥이 뛴다
침묵하던 영혼의 감실에
불을 켤 수 있겠다
꽃은 무슨,
이번에는 말없이 길게 내민 그의 이파리들
손수건 반만한 이파리들
내 수염 솟아 있는 볼 한쪽으로 쓰윽 문지르고 있다
- 강희근, <안시리움>, 부분
본회 고문인 강희근 시인은 열입곱 권의 시집과 많은 저서가 있지만 그는 유명한 시인이 아니라 실력있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생활에서 부딪치는 모든 대상으로 시를 쓴다. 시의 소재가 멀리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오솔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모든 것이 시의 대상임을 알려준다.
'안시리움'은 가정에서 많이 키우는 화초다. 그런데 경상도 사투리로 '안시리움'은 표준말 '안쓰러움'과 같은 말이다. 화초의 최고 미덕은 꽃을 피우는 일이라지만 그것을 피우기 위해 이파리들의 수고는 안스럽다는 것을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로 절묘하게 잡아내는 감각이 돋보인다. 특히 이제 막 올라오는 '꽃송이가 그의 이마로' '시인의 목을 쓰윽 밀고'있는데 '잠자던 감각의 끝에 불똥이 뛴다'고 한다. 그것은 '침묵하던 영혼의 감실에/불을 켤 수 있겠다'라 함으로써 카톨릭 신자인 그가 성체(聖體)를 모시는 감실(龕室)에서 잠자던 신앙, 혹은 시심이 살아날 것 같은 감각의 수준으로 밀어올리고 있다. 그러나 그 꽃을 피운 것은 '이파리'라는 사실을 은유로 말하는 것이다.
시를 아름답게만 쓸 수는 없다. 때로는 혐오스럽거나 비속적인 용어로도 시를 쓸 수 있다. 시의 아름다움이란 달콤하고 예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적 아름다움이란 '긴장(tension)'을 의미한다. 폭력적 세계를 그릴 때 그에 어울리는 말이 수반되는 것이 오히려 예쁜 말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다. 즉 내용과 형식의 일치를 통한 긴장감이 있는 시가 아름다운 것이다. 반대로 느슨하게 풀어져서 자극이 없는 말은 수다나 하소연, 또는 넋두리에 불과하지 시가 아니다. 지난주에도 말했듯이 감정을 무차별적으로 배설하는 것도 시가 아니다. 적절하게 절제하고 남김없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반만 말하고 그 뜻을 감추는데 시의 묘미가 있다. 시가 시로서의 생명을 갖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표현된 말들이 일으키는 정서적 파문이다. 그 파문은 문면에 드러나지 않은 침묵에도 많은 말이 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짧게 말하되 인간의 진실을 드러낼 수 있는 팽팽한 긴장감이 있다면 그 언어는 예쁜 말보다 훨씬 가치 있고 아름다운 시어가 된다는 말이다.
적게 말하되 언어의 밀도와 질을 적정하게 하는 작업, 결국 나를 드러내는 작업이 진정한 시 쓰기다. 무슨 모티프로 시를 썼다할지라도 결국 당신 삶의 편린을 담아야 제대로된 당신의 시가 탄생하게 된다. 현실이 힘들어도 산책을 할 수 있는 오솔길 하나는 갖고 있어야 덜 슬플 것이다.
- 이어산, <생명시 운동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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