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제91강 시가 되는 제목과 비시적 제목

귀촌일기 박뫼사랑 2017. 12. 25. 12:19
<토요 시 창작 강좌> 제91강

   ■ 시가 되는 제목과 비시적 제목

   시인 위에 평론가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말하지만 사실 나는 시를 쓰는 일이 평론을 하는 일 보다 더 어렵다. 남의 글은 잘 보이지만 내가 쓴 글은 내 감정에 사로잡혀 잘 안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터넷에 떠도는 이런 저런 시 창작법을 짜집기하여 너도나도 시 전문가나 평론가 행세를 하는 바람에 '시가 안 되는 사람들은 평론을 한다'는 말이 생겼을 정도다. 나도 그런 사람의 한 명이 아닌지 가끔 자문하기도 한다. 이 강좌를 통해서 시 창작의 온갖 방법을 강의하고 있지만 막상 내가 쓴 시를 볼 때 작품성이 뛰어난 것이라고 내세울만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가끔 ''선생님의 시를 보고 싶어요''라는 말을 누가 하면 나는 움찔하게 된다. 이런저런 시 창작법을 강의랍시고 했는데 글을 쓰다보면 내가 했던 그 말빚 때문에 이게 걸리고 저게 걸려서 시가 부자연스러워진 경험을 많이 했다. 우리나라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평론가인 김아무개 교수에게 물어봤다. ''그렇게 훌륭한 시평을 하시는데 왜 시를 발표하지 않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세계 최고의 명문 축구팀 감독이라도 그라운드에선 선수보다 공을 잘 찰 수는 없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지만 한편으론 나의 시 창작 강의를 읽고 그대로 실천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많은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에겐 지난 10여 년 동안 개인적 이유로 절필을 했던 공백기도 있었지만 요즘도 시를 발표하는 것에는 신중해진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니 나의 시 창작 강의가 좀더 진정성을 갖기 위해서는 이젠 시를 자주 발표하는 것도 회원들에 대한 도리이며 같이 실력을 키워가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혹 내가 앞으로 발표하는 시가 미진하더라도 이해하기 바란다.

   ● 객관적 표현과 주관적 표현

    지난 강의에서 시가 되는 표현과 시가 되지 않는 표현에 대해서 여러 번 말했지만 회원들이 올린 글을 보노라면 그런 내용을 참고하지 않은 글이 많았다. 나는 지금 ''글을 잘 쓰거나 못 쓰거나에 앞서 우선 시가 되어야 할 게 아닌가?''라고 직설적으로 묻는 것이다. 시 작법의 가장 기초인 시(詩)와 비시(非詩)를 구별할줄 모르면 진정한 시인의 반열에 절대 오를 수가 없다. 이것이 제대로 구분이 된다면 시의 높낮이에 관계없이 시인이 될 수 있다. 아무리 쉽거나 어렵더라도 일단 시가 되면 그 이후는 독자의 취향에 따라 취사선택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가 되도록 쓰느냐 못 쓰느냐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만큼 가장 중요한 것이며 시인과 비시인을 가르는 경계선이다.
   오늘과 다음 주에는 시와 비시(非詩)에 대해서 다시 언급하려고 한다. 오늘은 시의 반을 좌우한다는 '제목 달기'부터 살펴보자.

   시의 가치는 예술적 감흥이라고 했었다. 일반적으로 시는 지극히 주관적 상상력이고 다의적이며 심미적인데 반해, 비시(非詩)적인 글, 즉 산문(수필, 소설 등)은 객관적이고 설명적인 실증성에 그 무게를 둔다. 물론 산문이라고 해서 예술적 감흥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신문기사나 학술논문이 그러하듯 객관적 현실성과 그 의미가 확실하게 드러나도록 전달하는데 무게 중심을 두는 문학양식이 산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쓴 글이 지나치게 설명적이거나 누구나 생각해 봤음직한 흔한 내용, 모두가 알고있는 객관화 된 내용의 글인지를 우선 살펴야 한다. 사랑이나 이별, 그리움 등은 객관화된 글로 봐야할 만큼 흔한 내용이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 빼고 저것 빼면 뭘 써란 말인가?'' 반문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대상으로 글을 쓰더라도 새로운 시각으로 글을 쓴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새롭다는 것은 무엇인가? 남이 표현하지 않은 나만의 해석이다. 시는 나의 주관, 즉 글 쓴이의 생각이 들어있지 않으면 시 이전의 시, 시로 성장하지 못한 묘사문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의 귀에 익은 매끈한 글은 비시(悲詩)라는 것이다. 어떤 시인은 묘사만으로 시를 쓰기도 하지만 시가 추구하는 독특하고 새로운 미적 효과를 거두는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시인의 생각, 즉 철학이 없는 것은 시가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시를 쓰기 바란다. 너무 철학적이거나 교훈적, 지시적, 혹은 '이것이다'라고 강조하는 것도 비시적인 것이지만 우선 내 생각, 즉 사유 넣기에 성공하지 못하면 시가 안되거나 맹물이 된다는 생각을 하라.

   각종 시 백일장이나 문예지, 신춘문예에 응모했을 때 제목이 너무 평이하거나 객관적인 것은 거의가 예심에서 탈락하는데 그런 글은 제목에서 내용이 짐작되거나 또는 제목을 설명하느라 시가 자유롭지 못한 틀 속에 갇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우리 밴드에 올라온 글의 제목들이다. 제목이 객관적인지 내용이 짐작되는지 안되는지 살펴보자.

    1군
    떠나는 가을, 교훈, 추억, 행복, 단풍, 낙엽, 회상, 독거노인, 가을이면, 가을편지, 일상, 부모, 욕심, 고향친구

   2군
   겹 그리고 그 틈, 신발 이야기, 담쟁이 숫총각, 플렛폼에서, 장미단추, 태의 고향, 묶인자와 묶은자, 꺼진 촛불, 들풀의 잘못이 아니예요.

   위 1군의 제목들은 내용이 짐작되거나 우리 눈에 익은 단어들이다. 이런 제목이 붙게 되면 시의 긴장감이 반감되어서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궁긍증을 유발하기 힘들게 된다. 즉 '시의 낯설기'란 측면에서 제목부터 시적인 것에서 한 발 비껴서는 것이 된다. 반면 2군의 제목들은 대체적으로 새롭거나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으므로 일단 성공적인 제목달기가 되었다. 무슨 내용인지 읽어 보고싶은 동기를 1군의 제목들 보다는 좀더 강하게 부여하고 있지 않은가?
   현대 시에서는 제목이 성공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말이 정설처럼 굳어지고 있을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된다. '객관적이거나 평이한 것인가? 주관적이고 심미적인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시의 제목을 달 일이다.
   유명 시인들의 시 제목을 한 번 보자.

   울음이 타는 강(박재삼), 식칼론(조태일),
누더기 별(정호승), 나는 바퀴를보면 굴리고 싶어진다(황동규), 별을 팝니다(원구식), 1미터의 사랑(오탁번), 저 허공도 밥이다(신달자), 신발 한 짝(오세영), 다보탑을 줍다(유안진), 그 섬을 주고싶다(강희근), 사랑이여 어디든 가서(문효치), 칼의 기원(이기철)

   위 시의 제목은 일단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 내용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제목이 새로와야 독자는 관심을 가진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지금은 시인이 넘쳐나는 시대인지라 제목에서 그리움 타령, 사랑타령, 부모형제타령, 꽃타령, 고향타령, 어릴적 타령 등은 너무나 많은 시인이 써먹었고 진부한 유행가 같은 것이기에 과감히 빼라고 했었다. 꼭 빼라. 시를  제대로 써볼 요량이라면 너무 익숙한 것, 평범한 제목은 이미 비시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항상 하기 바란다.

   시를 쓰는 사람에 따라서는 시의 제목을 정해놓고 쓰기도 하지만 제목을 정해놓고 쓰면 시적 상상력이 제한을 받을 수 있다. 제목을 너무 의식하면 설명이 되어 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시의 제목은 시를 완성한 후에 다는 것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줄거리가 없이 맘대로 써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시의 줄거리는 반드시 미리 생각하고 쓰되 자유로운 상상력을 제한하지 말자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장미를 노래하는 시를 썼다고 했을 때 제목을 '장미'라고 달면 제목으로는 빵점이다. 하다 못해서 '정열'이라거나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등 장미와 연결되는 연합적 상상(이미지)의 제목을 다는 것이 시를 살게하는 방법이란 점을 관과해서는 안된다.

   다음은 필자의 졸시인데 제목과 내용을 연결해서 보기 바란다.


   부도(不渡)와 수제천(壽齊天)


   이어산


   북편엔 가위를
   채편엔 집게 들고
   칠순의 검버섯 핀 손
   고기를 굽는데
   화로의 숯불은
   여음(餘音)으로 연음(連音)으로

   하늘도 기울어져
   기더쿵 더러러
   구음(口音)도 휘어져
   궁더쿵 러러
   목이 맨 소리가
   울대를 넘는 동안
   엇박자로 파자(破字)되는
   ㅇ ㅓ  ㅁ   ㅁ  ㅏ
  
   화전밭 익어가듯
   불이 익어 노을되고
   아직도 어른이 못된
   아들의 세월이
   세상의 절벽에서
   천사처럼 날고픈데
  
   칠순의 어머니
   설움을 뭉텅떼어
   궁더쿵 갈라치며
   세월을 구워놓고
   젖은 가슴 인화시켜
   일어나라일어나라
   기더쿵 러러.


   위 시는 수제천(壽齊天) 연주의 중심 악기중 하나인 장구의 채편과 북편의 음보(音步)로 전체를 이끌어가고 있다. 시의 본문 중엔 부도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다. 다만 쉬어야할 것 같은 칠순의 어머니가 고기를 굽지만 그것은 제목이 암시하듯 부도를 맞은 아들을 어떻게라도 일으켜 보려는 늙은 어미의 절절한 사랑이다. 기울어지는 하늘, 세상의 절벽에 선 것 같은 절망감과 패배감에 사로잡힌 그 아들은 어린애처럼 '엄마'라고 불러보고 안겨보고 싶지만 차마 파자(破字)되어 제대로 부를 수 없는 현실이다. 무기력해 보이는 늙은 어미는 인생 3악장 끝부분인 여음(餘音)은 끝이 아니라 4악장을 위한 연음(連音)임을 애써 몸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늘을 향한 '수제천'이라는 내용이다. 제목에서 너무 내용이 드러나거나 제목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내용이 너무 평이하면 재미 없는 시가 되거나 비시가 된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예시였다.

   다음 주에는 시와 비시의 본문 쓰기에 대해서 한 번 더 볼 것이다.

                - 이어산, <생명 시 운동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