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시창작 강좌> 제89강
■ 시가 되는 글과 시가 되지 않는 글
다음은 오세영 시인이 쓴 시론서에 나오는 글인데 어느 시창작 교실의 수강생의 글을 소개하고 있다. 먼저 시가 되는지 안 되는지 감상해 보자.
길을 건너려는데
건너 편 길가에서
소나타가 급정거를 한다.
달려오던 오토바이가 피하려다가
넘어지고
젊은이가 쓰러진다.
피자 헛이 쏟아지고
길바닥에 흩어지는
피자조각들
젊은이의 하루가 산산조각나고
그 위로 바퀴들이 지나간다.
소나타에 젊은이가 실려가고
아스팔트에 피자 헛의
비명이 갈린다.
신호등이 다시 바뀌고
차들은 아무 일 없이 달린다.
주인 없는 오토바이가
이길 옆에 누워 있다.
<횡단 보도 앞에서> 전문
이 글은 실제 일어난 상황을 시각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시적인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르적으로는 시라 할 수 없다. 자기가 목격했던 교통사고의 순간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이 말은 사실의 묘사만으로는 시가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시는 사실 이면에 숨겨져 있는 어떤 진실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사실은 객관적이지만 진실은 어느 정도의 주관성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위의 글은 사실의 기록에 가깝다는 점에서 순수문학인 시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다음의 시는 다르다.
젖꼭지가 까맣게 말라붙은 어머니 가슴처럼
쩍쩍 금이 간 길마다 귀를 대 본다.
되직하게 풀 먹여 말린 이불 호청 서걱이는 소리
꽉 조였던 슬픔의 좁은 솔기 터지는 소리 들린다.
햇볕을 착착 아귀 맞게 접어 놓고
수천 번 다듬이질로 갈 무리할 줄 알았던
그 시절은 이미 전설이 되었고
없어진 그늘 자리같은 서늘한 기운만 남았다.
완벽한 오체투지(五體投地)
세상에 젖지 않고 마를 수록 저렇게
가볍게 자기를 던질 수 있음을 본다.
- 이인원, <장작> 전문
인용시는 마른 장작을 통해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랑을 노래한 글이다. 시인은 말라비틀어진 장작개비 속에서 어머니의 마른 젖가슴을 상상하고, 땅바닥에 내 던져진 장작개비 속에서 자식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버린 어머니의 헌신적 사랑을 본다. 그러므로 이 시의 장작은 사실로서의 장작이 아닌 진실, -사랑과 헌신-의 장작이다.
미술에 대한 안목이 없는 사람에게 고갱이나 샤갈의 그림을 평가 하라고 하면 제대로 평가를 할 수 있겠는가? 조선 백자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에게 그 가치의 평가를 받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도 그렇다. 시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이 시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 사실에 둔감하다. 자기가 이해가 되는 시, 사실적 묘사에 그친 쉬운 시가 좋은 시라는 착각이다. 즉, 시를 읽는 사람의 수준에서 이해되고 즐기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한다. 그렇게 시를 읽는다고 시비를 걸 마음은 없다. 다만 이 말에는 '나는 시에 대해서 잘 모르는 초보자이기에 시를 대충 읽겠다'는 고백이 담겨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골치 아프게 시를 읽고싶지 않다는 뜻이다. 시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 중에서도 이런 생각을 가진 경우를 가끔 보게된다. 그러나 시에는 깊은 사유와 시인의 상상력이 가공되고, 일상적 어법이 아니라 비틀어서 말하는 것이기에 시를 가볍게 읽어서는 시의 표면에 나타난 사실적인 것에만 반짝 관심이 스칠 뿐 진실이나 시의 본질에는 접근 하기가 쉽지않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지만 시에는 더 강력하고 섬세한 시인의 의도가 반영되고 숨겨져있기 때문에 꼼꼼히 살펴서 읽고 두 번 세 번 읽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시인의 의도가 다 드러난 글은 산문이지 시가 아니다. 내가 계속 강조해온 '난해한 시를 멀리하고 서정으로 돌아가자'라는 말과, 의도가 훤히 드러난 쉬운 시를 혼돈하면 안 된다. 그래서 시는 내맘대로 읽으면 안 되는 장르이다. 시를 자유롭게 읽을 수 있으려면 다소 어려운 훈련과정이 필요하다. 시를 읽을 줄 모르면 시를 제대로 쓸 수도 없기에 시를 읽어내는 능력을 기르는 일은 시를 창작하는 일보다 항상 먼저다. 그러면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며 어떻게 독자가 공감하는 시를 쓸 것인가라는 고민에 또다시 봉착하게 된다.
● 공감을 자아내는 시 읽기와 쓰기
시에 공감 한다는 것은 그 시에 동의한다는 것이고 내가 그 시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또한 공감을 자아내는 시를 쓴다는 일도 시인의 의도와 감성이 독자에게 스며들어 섞이도록 하는 작업이다.
우리는 두 가지 경우의 공감을 보게 되는데, 그 하나는 친숙한 것이고 하나는 새로운 것이다. 친숙한 것에 공감한다는 것은 재발견(재확인)과 관련한 것이고, 새롭고 낯선 것에 공감한다는 것은 발견과 관련한다. 그런데 친숙한 언어로 시를 쓰든 친숙함을 배반하는 시를 쓰든 간에 둘 다 개성이 있어야 좋은 시가 된다는 점이다. 개성이란 독자성과 창의성이 있어야 함을 말한다. 아무리 멋진 말로 이루어진 시라도 다른 사람이 쓴 것과 ''비슷한 것은 가짜다''라는 정민 시인의 말은 시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가슴에 새겨놔야 할 말이다. 개성적이란 보편적인 것에서 일탈하는 것이고 애매성의 결합이다. 여기에서 애매성이란 수수께끼 같은 직접적 이해가 가능하지 않은 문장이 아니라 월리엄 엠프슨이 말한 '다의성' 또는 '뜻 겹침'에 가깝다는 것이다. 중층묘사를 하라는 말이다.
감성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기에 시적 진실은 산문과는 달리 정서적 반응이라는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드러남이 아니라 감춰서 찾게 하고 애매함 속에 진실을 감춰놓는 것이 시 쓰기의 기본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 이어산, <생명 시 운동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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