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시 창작 강좌>제75강
■ 좋은 시를 쓰기 위한 한 방
시를 쓰다보면 이해가 안 되는 일이 가끔 있다. 내가 쓴 시나 유명 시인이 썼다는 그 시와의 차이가 별로 없어 보이는데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유명 시인의 시는 잘 썼다고 하면서 나의 시에는 고칠데가 많다는 지적을 한다. 내가 볼 때 나의 시도 꽤 괜찮아 보이는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며 그들의 시와 어떤 것이 다른지 진짜 궁금할 때가 있는 것이다.
아마추어 시인의 시가 잘 안되는 결정적 이유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시에 뼈가 없는 경우라고 나는 생각한다. "시에 뼈가 없다니?!" 그렇다. 뼈는 없고 말은 많다. 말이 많다는 것은 독자가 이해하지 못할까봐 덧붙이는 친절한 설명이다. 설명을 과감하게 빼지 않으면 당신의 글은 평생 시의 언저리에서 맴돌다 주저 앉게 될 수도 있다. 산문의 미덕은 친절하게 설명하는 가지가 무성한 나무라면, 시는 적게 말하면서 상징적인 뼈를 보여주는 나무이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문학 장르이기에 그렇다. 가지가 많을 수록 오히려 지탱하는 힘이 약해지는 것이 역설적인 시의 특징이다. 시가 짧든, 길든 간에 그 시의 튼튼한 줄거리, 즉 뼈대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잘쓴 시와 못 쓴 시를 가르는 중요 요인이다.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다>의 저자 이의수(남성문화연구소장)의 사안론(四眼論)에 공감했던 것은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시안론(詩眼論)과 비슷한 개념이기에 오늘은 나의 관점에서 소개한다.
육안(肉眼)으로 보고 생각했던 것, 즉,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보통의 현상을 붙잡고 이것을 뇌안(腦眼)으로 잘못 설명해 버리면 천박한 화장을 한 사람이 함부로 말을 하는 것처럼 되기 쉽다. 처음 시를 쓰는 사람들은 보통 머리로 시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뇌안으로 시를 쓴다는 것이다. 감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꼈을법한 내용을 세상에서 처음 발견한 것인 양 발표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그런 글은 '껍데기 글', 또는 흘러간 유행가처럼 지루한 글이 되기 쉽다. 독자에게서 감동을 이끌어 내기가 힘든 것은 시로 성장하지 못했거나 혹 시가 되더라도 재미없는 시다. 시는 새롭고 신선한 본질의 이야기가 생명이며 거기에 나의 사람살이와 연결되는 재미를 더한다면 금상첨화다. 그 본질의 이야기가 바로 <시의 뼈대>이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적게 말하되 적확(的確accuracy )한 단어로 말하고 직접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닌 뚜렷한 이미지가 떠오르도록 하는 것이 튼튼한 뼈대를 세우는 일이다. 그래서 시인은 보통 속에서 특수를 찾고 특수한 것을 묶어서 뼈대를 만드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지난 주 강의에서 강조한 바 있다. 그렇다고 시의 언어가 특별한 천상의 언어는 아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사용하는 구어(口語)이다. 그 단어들도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색채가 별로 없는 평범한 것이지만 그것을 조합하여 입체화 시키는 작업, 즉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 하는 것이 시 쓰기라는 말이다. 말은 쉬운데 그게 쉽게 되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렇다. 쉽게 되면 사천 만이 시인이 될 것이다. 노력없이 시인이 될 수는 없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란 말이 있듯이 한 번 시인으로 등단하면 시를 잘쓰든 못쓰든, 일류이든 삼류이든 "시인"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데 시인이라는 이름의 질(質)이 문제이지만 아무나 시인의 이름을 갖게 되면 되겠는가?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익숙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독특하게 보고 말하는 능력, 비틀어서 보고, 거꾸로 보고 새롭게 해석한 것을 나의 사람살이와 연결하는 능력을 길러야 시인이 되는 것이며 시인은 안 되더라도 시인을 알아보고 그런 시인을 길러내는 훌륭한 독자가 되는 것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시인은 없다. 깊은 고뇌와 시간의 투자 없이 쉽게 시가 씌여진다면 얼마나 좋으랴 마는 시를 쓰는 일은 산고의 고통을 감내 해야 한다는 말이 실감 날 때가 있다. 그만큼 땀과 정성과 시간과 눈물까지도 쏟아 부어야만 하는 일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런 노력 없이 시인이 되려는 것은 임신한지 한두 달 만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튼튼한 아이를 낳겠다는 욕심과도 같다.
시를 잘 쓰는 사람은 현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보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 한다. 본성을 보는 눈을 심안(心眼), 또는 심미안(審美眼)이라고 하고 그 이상의 것을 보는 눈을 영안(靈眼), 즉 영혼 속에 간직하고 있는 눈이라고 하는데 지난 주에 소개했던 시작(詩作)의 중요한 개념인 <상징계/현상>와 <실재계/본성>와 같은 내용이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의 이론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한다. '육안과 뇌안'은 상징계(像徵界), 즉 현상이라는 껍데기를 보는 것"이고 "심안(심미안)과 영안은 실재계(實在界), 즉 본질을 보는 것이라고 했을 때, 시의 <뼈대>는 결국 실재계의 이야기(實在界의 顯現)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시를 잘 쓰는 사람은 사물의 뼈를 이미지화 시키는데 반하여 초보자는 사물의 본질, 즉 이미지에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라 현상(잔 가지)에 신경을 쓰느라 정작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끝내버리는 경우가 많다.
현대시학에서는 특별한 시어(詩語)의 효용가치 보다는 보통의 언어를 조탁(彫琢)한 <시의 언어>에 눈길을 준다. 화려한 개개의 시어를 찾던 시대는 지났다. 현상뒤의 숨어 있는 본질을 주재료로 하고 비유라는 시의 언어로 맛을 내어서 적확(的確)한 크기의 쟁반에 담아 독자의 식탁에 올려놓는 일이 시를 쓰는 일이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한 한 방"이란 결국 "본질을 알아보는 눈"임을 잊지말자.
- 이어산, <생명시 운동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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