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제74강 보편과 특수

귀촌일기 박뫼사랑 2017. 12. 25. 11:58
<토요 시 창작 강좌> 제74강

   ■ 보편과 특수

   지난 6월28일, 대한민국 미술사에는 획기적인 일이 있었다. 파란색의 점묘법으로 그려진 고 김환기 화백의 그림 한 점이 우리나라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인 54억 원에 낙찰된 것이다.
   나는 이 그림을 이해해보려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아무리 봐도 처음에는 심상이 잡히질 않았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이 그림이 오히려 싸게 팔렸단다. 문제의 그림을 감상해보자.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54억 원짜리 그림인데 환호할만한가?
   어떤 이는 "5백4십만 원에 팔겠다고 해도 안 사겠다"라는 말을 했다. 진품을 보지 않고 자기 수준에서 말한 것이다.  이 그림은 가로264cm×세로202cm나 되는 대작이다. 자세히 보면 "어떻게 저렇게 표현 할 수 있을까?!"하고 감탄을 금치 못할 만큼 뛰어난 작품임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그 작품을 볼줄 모르는 우리는 언론에 보도된 단편적인 것만 보고 선입견으로 평하는 경우가 많다. 시도 그렇다. 시의 초보자는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훑어보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 보듯 진품이 아니라 손바닥보다 작은 그림을 놓고 평을 한다면 그것이 제대로 된 것이 아니 듯, 아무리 좋은 시라도 그것을 정독하고 시의 이미지를 볼 줄 모르면 시가 엉뚱하게 해석 되거나 수준 낮은 것으로 폄훼(貶毁)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나는, 우리 회원들이 시를 쓰면서 평생 기억해야 할 중요한 개념을 소개한다.
   시의 아마추어는, 보편적인 눈(전문 용어로 '상징계'를 보는 눈)으로 시를 보고, 시의 전문가는, 특수하거나 문자뒤에 숨겨진 이미지를 보는 눈(전문 용어로 '실재계'를 보는 눈)으로 본다. 보편 속에서 특수를 찾고 특수를 묶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가리켜 "시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를 쓴다는 것은 <실재계(實在界)>를 볼 수 있는 시안(詩眼)을 여는 일이다. 다시 강조한다. "시는 보편 속에서 특수를 찾고 특수를 묶어서 입체화 시키는 일이다" 일반적 사람살이는 '보편의 삶'이고 시인의 사람살이는 '특수의 삶'임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김환기 화백의 그림을 소개하는 유홍준 교수의 강연에서 나의 귀에 크게 들렸던 말이 있었는데 김환기 화백을 "자연을 노래하는 음유시인"이라고 했고 "영원을 찬미하는 조형시인"이라는 평을 했다.  예술은 예술에 연결되어 있다지만 특히 시는 '말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강조해온 나는, 그림 또한 '그려서 말하는 시'라는 사실임을 다시 한 번 깨닫고 그의 명강에 무릎을 쳤던 기억이 있다. 평소에 그림에 대한 관심이 많은 나도 솔직히 이해가 잘 안 됐던 그림도 평론가의 말을 참고하고 도록(圖錄)의 설명을 유심히 보면서 조금씩 눈이 열렸지만 전문가들이 그림을 보는 수준은 아마추어인 내가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월등한 눈을 갖고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요즘은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몇 번씩 다시 가서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다 보니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말이 조금씩 이해가 될 정도는 되었다. 시도 독자의 눈높이에서 그 작품성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의 가치, 즉 시적 구성요소가 탄탄하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새로운 것(실재계의 현현/實在界의 顯現)일 때 시를 아는 사람, 즉 전문가들에 의해서 그 가치를 더욱 높게 평가받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시의 전문가, 즉 평론가나 시력이 오래된 제대로 된 시인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시를 써놓고 퇴고를 할 때는 반드시 자기보다 잘 쓰는 사람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다. 자기와 비슷한 실력이거나 시를 잘 모르는 일반인의 칭찬에 우쭐해한다면 시가 계속 발전하기가 힘들게 되고 고만고만한 수준에 머물게 되기 쉽다.
   옛날 이발소에 흔히 걸려있던 그림처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대중시가 있고, 편안하고 약간의 수준이 있어 보이는 교양시, 무릎을 칠만한 새로운 절창구와 이미지가 시를 끌고가는 전문시가 있다는 것을 지난번 강의를 통하여 소개 한 적이 있지만, 제대로 된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독자가 먼저 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시를 읽어 낼 능력이 안되면 쓸 능력은 더욱 안 되는 것이다. 잘 쓴 시로 회자되는 남의 시를 읽어낼 능력이 안되면서 시를 잘 쓰는 경우는 드물다. 혹 다른 사람들이 나의 시를 칭찬 한다고 해도 사실 내 시는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다라는 생각으로 시를 읽는 능력을 반드시 키워나가기를 바란다.

   매년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들을 보면서 여기저기에서 불만이 터져 나온다.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저 시를 당선작으로 뽑다니?!" 처음엔 나도 그런 불만으로 "혹시 심사 위원들이 단합하여 자기 사람을 뽑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했으니 말이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시를 뽑으니 시가 독자들에게서 멀어진다"라고 걱정을 한다. 그러나 현실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소리다. 요즘 세상은 유리상자 속에서 활동하는 것처럼 노출되어 있기에 수준이 안되는 것을 잘못 뽑았다가는 그 심사위원은 크게 비난을 받거나 낭패를 당하기 쉽다. 신춘문예나 시 전문지에 응모한 작품을 심사하는 그 사람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시인이나 평론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문학에 관심있는 국민들이 전국에서 보고 있는데 엉터리를 뽑으면 그 사람도 엉터리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 또한 수많은 시인과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그 작품들을 분석하고 작품성의 수준을 따지는데 함부로 뽑겠는가? 그래서 초보자들은 더욱 자세를 낮추고 왜 그런 시가 뽑혔는지를 공부해야 한다. 유명 시인들의 흉내나 내는 매끈하거나 예쁜 시는 3류 잡지가 아니고서는 절대 뽑지 않는다. 신인은 신인다와야 한다. 뭔가 새로운 실재계를 발견한 것이 아니면 앞으로 치고 나갈 수가 없다. 수없이 되풀이 하는 말이지만 관습적인 말놀이를 짧게 줄여서 말하되 최대한의 뜻을 담고 새로운 것을 찾는 노력이 신인에게 요구되는 시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길게 풀어서 말하면 소설이 되지만 처음부터 암시적인 말, 역설적인 말의 자리에 시가 놓이도록 연습을 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 보편적인 말의 덩어리에서 특수한 언어나 이미지를 찾거나 넣어서 감동을 만들어 가는 작업이 시 쓰기다. 말을 늘어놓았음에도 감동을 주지 못하는 시는 일단 실패한 시로 봐야 한다. 시는 구체적인 감각에 기대는 <실재계의 감동 문학>이다. 관념어 중심으로 쓴 시를 완성된 시라고 발표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되면 시 이전의 시가 되기 쉽다. 관념적(觀念的)이란, 현실성이 없고 추상적인 것이다. 그 반대말이 체험적(體驗的)이다. 체험을 이미지로 연결 시키는 연습을 하는 것이 실재계의 결합이고 시가 되도록 하는 시 쓰기의 기본이다. 체험에는 직접체험과 간접체험이 있는데 지난 강의에서 몇 번 언급 했기에 참고하기 바란다.

   나는 전문시와 대중시, 그리고 교양시의 갈래를 소개 하기도, 시에 재미와 웃음을 넣자고 강조한 바도 있다. 그런데 우리 밴드에 올라오는 시 중에는 대중성이 강조되는 시와, 무겁거나 우울한 관념시가 아직은 많다. 대중시란,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만한 평균적인 생각과 느낌 안에서 기존 명성이 있는 시의 시류성을 쫒기도 하고 낯익은 체험의 넋두리, 또는 짜집기를 한 것 등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의 발밑에 놓인 삶의 친교, 교훈적이고 교조적인 교양시도 그 소박한 자리를 무시할 수는 없어도 시를 배울 때는 기존 문화와 익숙한 것에 맞서는 창조성에 시선이 머물기를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그래야 제대로 인정받는 시를 쓸 수 있다. 그래도 고무적인 현상은 우리 밴드에 올라오는 시가 지난 한 달 만에 상당히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몇 달만 더 집중하면 경쟁력 있는 시가 많이 나올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이곳은 완성된 시를 발표하는 곳이라는 생각을 버려라. 독자이거나 등단을 했던지, 하지 안 했던지에 상관없이 시를 배우고 계속 퇴고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시를 제대로 알아가자는 공간이다. 실험적인 새로운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개척하려는 자세가 전문시를 읽어내거나 쓸 수 있는 길로 들어서는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 이어산, <생명시 운동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