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산 토요 강좌> 제38강
시 이론을 공부하면 시를 잘 쓸 수 있을까? 시 이론을 알고 쓴 시와 모르고 쓴 시는 어떻게 다른가?
시는 본질적으로 이론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시는 이론을 초월하여 모순과 갈등의 구조 속에서 존재하는 예술이기에 시를 논리적으로 분석하거나 해명하는 작업이 때로는 부질없는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물을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파악해야하는 시에서는 획일적인 논리와 법칙이 오히려 시를 망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론(詩論)을 집대성한 저서인 시학(詩學/Poetics)을 펴낸 이후 유구한 세월에 걸쳐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시론의 천착이 지속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인간으로서의 본능인 동시에 기존의 사실, 혹은 존재에 대하여 깊이 파악하고 탐색하고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려는 강한 욕망이 시에 대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시학, 또는 시 이론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시론이다"라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시(詩)와 반시(反詩)를 나눌 수 있고, 시가 아닌 비시(非詩)를 가려낼 수는 있는 것이다. 특히 요즘 시단(詩壇)의 사조는 시를 쓰려는 사람의 성향을 파악하여 그 사람에 맞는 방법으로 시를 쓸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작법(作法)이 제일 효과적인 것으로 보는 지도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나도 그 입장에 동조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객관적 척도와 지식으로 시에 접근하는 방법이 과연 시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인가'하는 문제에 다시 봉착하게 된다. 시는 학문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시에서는 객관적 타당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다의적인 접근을 통하여 정서의 울림을 탄주하는 작업인 것이다. 즉 시는 지식이 아니라 정서적 지혜를 요구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 최고의 표현 방법이다. 그래서 T.B매콜리는 "시란, 어휘를 사용 하여 상상력 위에서 하나의 환상을 산출해 내는 예술이다"라 했다.
조선의 정약용은 증언(贈言)에서
"시라는 것은 사상의 표현이다. 사상이 본디 비겁하다면 제아무리 고상한 표현을 하려해도 이치에 맞지 않으며, 사상이 본디 협애(狹隘)하다면 제아무리 광활한 묘사를 하려해도 실정에 부합하지 않는다. 때문에 시를 쓰려고 할 때는 그 사상부터 단련하지 않으면 똥무더기 속에서 깨끗한 물을 따라 내려는 것 같아서 일생토록 애를 써도 이룩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즉, 시를 쓰려는 사람이 사람답지 않거나, 삶이 그 시를 받혀주지 못하면 그 사람은 거짖된 사람, 혹은 거짖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시론을 정약용 선생님은 이미 갖고 있었던 것이다. 옛날 과거시험에서 시제(詩題)를 주고 시를 쓰게하는 이유도 그 사람의 사상과 사람됨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 옛 선비들은 시를 거짖으로 쓰는 것을 가장 부끄러운 일로 생각했기에 시로 과거시험을 치루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씨알의 소리 함석헌 선생님이 살아 계실 때, 나는 그를 모시고 경남 진주의 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서울에서 출발한 고속버스의 옆자리에 앉아서 다섯 시간 동안 <뜻으로 본 한국사>를 축약하여 들을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가졌었다. 진주에서 청중을 향한 강의는 한 시간 반이었지만 나는 다섯 시간을 일대일로 들었는데 한 번도 의자에 머리를 기대지 않고 카랑하고 열정적인 당신의 사상을 들려 주셨는데 노구가 무색할 정도로 진지하게, 때로는 단호한 그의 말씀은 너무나 감동적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면서 느껴졌던 전울은 지금도 생생하다. 특히 시에 대해서 하신 말씀 중에서 "시는 시인의 고백이야. 신 앞에서 하는 고백이란 말이야. 거짖된 시는 신을 속이려는 것이거든, 그래서 시는 참이야! 자네가 정말 시를 쓰려면 이 말을 꼭 기억해!"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선문답 같기도 하였지만 곱씹어 볼수록 눈물 나도록 고마운 진리였기에 삽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말씀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아서 내 생애에서 들을 수 있었던 최고의 시론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 두 편의 시는 또다른 나의 시론 시(詩論 詩)다.
문득 한 줄의 시가 일어섰다
작업모를 쓰고
장갑을 끼고
시는 어둠의 진한 성감대(性感帶)를
후볐다
잠시 후 꽃의 기침 소리가 나고
텅빈 마당이 다시 조립되는 소리가 나고
삽질하는 시의 섬광이 번쩍이고
- 이규호, <시가 아침을> 에서
불빛 한 점이 마주 오고 있다
충돌위험에 경고신호를 보내도 막무가내이다
무전을 쳤다 "10도 우향하라"
응답이 왔다 "10도 좌향하라"
함장은 다시 쳤다 "나는 대령이다 명령에 따르라"
응답이 또 왔다 "나는 일병이다 지시에 따르라"
기가 찬 함장은 최후통첩을 보냈다
"여긴 군함이다 명령 무시하면 박살난다"
응답이 다시 왔다
"여긴 고장난 등대다 지시 무시하면 박살난다"
- 유안진, <오만과 편견>전문
<사진은 함석헌 선생과 그의 시>
시 이론을 공부하면 시를 잘 쓸 수 있을까? 시 이론을 알고 쓴 시와 모르고 쓴 시는 어떻게 다른가?
시는 본질적으로 이론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시는 이론을 초월하여 모순과 갈등의 구조 속에서 존재하는 예술이기에 시를 논리적으로 분석하거나 해명하는 작업이 때로는 부질없는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물을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파악해야하는 시에서는 획일적인 논리와 법칙이 오히려 시를 망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시론(詩論)을 집대성한 저서인 시학(詩學/Poetics)을 펴낸 이후 유구한 세월에 걸쳐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시론의 천착이 지속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인간으로서의 본능인 동시에 기존의 사실, 혹은 존재에 대하여 깊이 파악하고 탐색하고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려는 강한 욕망이 시에 대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시학, 또는 시 이론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시론이다"라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시(詩)와 반시(反詩)를 나눌 수 있고, 시가 아닌 비시(非詩)를 가려낼 수는 있는 것이다. 특히 요즘 시단(詩壇)의 사조는 시를 쓰려는 사람의 성향을 파악하여 그 사람에 맞는 방법으로 시를 쓸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작법(作法)이 제일 효과적인 것으로 보는 지도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나도 그 입장에 동조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는 '객관적 척도와 지식으로 시에 접근하는 방법이 과연 시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인가'하는 문제에 다시 봉착하게 된다. 시는 학문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시에서는 객관적 타당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다의적인 접근을 통하여 정서의 울림을 탄주하는 작업인 것이다. 즉 시는 지식이 아니라 정서적 지혜를 요구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 최고의 표현 방법이다. 그래서 T.B매콜리는 "시란, 어휘를 사용 하여 상상력 위에서 하나의 환상을 산출해 내는 예술이다"라 했다.
조선의 정약용은 증언(贈言)에서
"시라는 것은 사상의 표현이다. 사상이 본디 비겁하다면 제아무리 고상한 표현을 하려해도 이치에 맞지 않으며, 사상이 본디 협애(狹隘)하다면 제아무리 광활한 묘사를 하려해도 실정에 부합하지 않는다. 때문에 시를 쓰려고 할 때는 그 사상부터 단련하지 않으면 똥무더기 속에서 깨끗한 물을 따라 내려는 것 같아서 일생토록 애를 써도 이룩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즉, 시를 쓰려는 사람이 사람답지 않거나, 삶이 그 시를 받혀주지 못하면 그 사람은 거짖된 사람, 혹은 거짖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시론을 정약용 선생님은 이미 갖고 있었던 것이다. 옛날 과거시험에서 시제(詩題)를 주고 시를 쓰게하는 이유도 그 사람의 사상과 사람됨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 옛 선비들은 시를 거짖으로 쓰는 것을 가장 부끄러운 일로 생각했기에 시로 과거시험을 치루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씨알의 소리 함석헌 선생님이 살아 계실 때, 나는 그를 모시고 경남 진주의 강연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서울에서 출발한 고속버스의 옆자리에 앉아서 다섯 시간 동안 <뜻으로 본 한국사>를 축약하여 들을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가졌었다. 진주에서 청중을 향한 강의는 한 시간 반이었지만 나는 다섯 시간을 일대일로 들었는데 한 번도 의자에 머리를 기대지 않고 카랑하고 열정적인 당신의 사상을 들려 주셨는데 노구가 무색할 정도로 진지하게, 때로는 단호한 그의 말씀은 너무나 감동적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면서 느껴졌던 전울은 지금도 생생하다. 특히 시에 대해서 하신 말씀 중에서 "시는 시인의 고백이야. 신 앞에서 하는 고백이란 말이야. 거짖된 시는 신을 속이려는 것이거든, 그래서 시는 참이야! 자네가 정말 시를 쓰려면 이 말을 꼭 기억해!"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선문답 같기도 하였지만 곱씹어 볼수록 눈물 나도록 고마운 진리였기에 삽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말씀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아서 내 생애에서 들을 수 있었던 최고의 시론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 두 편의 시는 또다른 나의 시론 시(詩論 詩)다.
문득 한 줄의 시가 일어섰다
작업모를 쓰고
장갑을 끼고
시는 어둠의 진한 성감대(性感帶)를
후볐다
잠시 후 꽃의 기침 소리가 나고
텅빈 마당이 다시 조립되는 소리가 나고
삽질하는 시의 섬광이 번쩍이고
- 이규호, <시가 아침을> 에서
불빛 한 점이 마주 오고 있다
충돌위험에 경고신호를 보내도 막무가내이다
무전을 쳤다 "10도 우향하라"
응답이 왔다 "10도 좌향하라"
함장은 다시 쳤다 "나는 대령이다 명령에 따르라"
응답이 또 왔다 "나는 일병이다 지시에 따르라"
기가 찬 함장은 최후통첩을 보냈다
"여긴 군함이다 명령 무시하면 박살난다"
응답이 다시 왔다
"여긴 고장난 등대다 지시 무시하면 박살난다"
- 유안진, <오만과 편견>전문
<사진은 함석헌 선생과 그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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