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집 / 아도니스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6. 5. 11. 06:13

집 /  아도니스

나는 고개 숙인다, 슬픔의 가면 아래
시들어가는 얼굴들에게, 내가 눈물을 잊고 지나온
길들에게, 구름처럼 파릇파릇할 때
돌아가신, 얼굴에 돛을 달고 있던 아버지에게
나는 고개 숙인다,
팔려가서
기도하고 구두를 닦는 아이에게
(내 나라에서는 모두가 기도하고 구두를 닦는다),

이것은 내 눈꺼풀 아래로 구르듯 떨어지는 빗방울이자 번개라고
나의 굶주림이 새겨 넣은 바위에게,
상실의 시기에 내가 그 흙먼지를 짊어졌던 집에게
나는 고개 숙인다-이것들이 바로 나의 집이다, 다마스쿠스가 아니라.

- 아도니스(1930~)


‘아랍 시의 T. S. 엘리엇’이라 불리는 아도니스는 아랍권에서 노벨 문학상 후보로 가장 유력하게 꼽히는 시인이다. 시리아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다마스쿠스, 베이루트, 레바논을 거쳐 1985년 프랑스로 망명했다. ‘집’은 최근에 출간된 번역시집 <다마스쿠스인 미흐야르의 노래>(황유원 옮김, 은행나무)에 실려 있다. 이 시집에는 ‘미흐야르’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는 실재하는 인물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시들에서 “바람의 왕” “야만적인 성자” “길 잃은 신” “흙먼지의 마법사” 등으로 호명되기도 한다. 이 시에서 ‘나’는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인다. 시들어가는 얼굴들에게, 눈물을 잊고 지나온 길들에게, 젊어서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팔려가서 구두를 닦는 아이에게, 굶주림이 새겨 넣은 바위에게, 상실의 시기에 머물렀던 집에게 ‘나’는 고개 숙인다. “내 눈꺼풀 아래로 구르듯 떨어지는 빗방울이자 번개”라는 표현을 보면, 아마도 ‘나’는 울고 있는 듯하다. 세상의 모든 슬픔과 죽음과 기도와 노동과 굶주림과 상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시인은 말한다. “이것들이 바로 나의 집”이라고. 망명 시인은 그 뿌리 뽑힌 존재들을 집으로 삼아 함께 떠돈다. 그의 시에 자욱하게 날리는 흙먼지처럼.

[경향신문 나희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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