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설에 부쳐
밤새 창밖에서는
하늘이 오래 품어 온 이야기들을
눈송이로 뜯어 보내고 있었다
새벽녘 첫 문을 여니
마당은 이미 소리 없이 바뀐 세계
흰빛의 문장이 겹겹이 쌓인
거대한 책장처럼 서 있었다
나는 그 책장 사이로
조심스레 발을 들였다
한 걸음마다
오래 미뤄 두었던 기억들이
눈 속에서 낮게 숨을 쉬었다
잊었다 여겼던 이름 하나
멀어졌던 얼굴 하나
그들의 체온 같은 기척이
하얀 들판 한중간에서
나를 천천히 불러세웠다
대설은 때로
사람이 묻어두려 했던 것들까지
함께 끄집어 올리는 법
사소한 다툼
놓치고 지나온 미안함
끝내 전하지 못한 작별의 말들이
눈발에 실려 흩날리며
내 어깨 위에 가만히 내려앉았다
그러나 한참을 걷다 보니
그 무게는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마치 세상 모든 마음이
한 번쯤은 눈 속에 누워
찬 기운을 식혀 온 뒤
다시 새로 걸음을 떼듯이
나는 그때 깨달았다
대설이란 단지 하얀 풍경이 아니라
지나간 날들을
다시 읽게 하는 계절이라는 걸
추억도 후회도
찬 바람 속에서 다져져야
비로소 새로운 길의 밑돌이 된다는 걸
눈은 계속 내리고
나는 그 속에서
당신에게로 가는 길을 찾았다
멀리서 창이 흐릿하게 불을 밝히고
그 빛 아래 서 있는 당신의 그림자는
눈발 사이로 아련히 흔들렸다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던 안부가
입술 끝에서 천천히 녹아내렸다
'올해도 많이 추웠지요
당신의 마음은 괜찮았나요
혹시 홀로 서 있는 시간이
너무 길진 않았나요'
그 말을 나는
눈이 대신 전해주길 바랐다
한 송이 또 한 송이
당신의 창턱에 내려앉아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길 바라며
그렇게 대설의 하루는
우리의 오래된 시간을
부드럽게 다시 적어 내려갔다
희고 끝없는 페이지 위에
지워진 듯 남아 있던 발자국들이
다시 선명해지고
서러움도 그리움도 결국은
따뜻한 생의 한 대목이라는 것을
조용히 가르치듯이
오늘 눈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 흰 침묵이 지나가면
우리의 길도 다시 다져져
더 멀리 더 깊이
따뜻한 내일을 향해
열릴 것이라는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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