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의자를 닮은 밤하늘 / 이장욱
가을이라서 그럴까?
나는 의자를 잊은 채
의자에 오래 앉아 있었다.
잠을 완전히 잊은 뒤에
잠에 도착한 사람 같았다.
거기는 아이가 아이를 잃어버리는 순간들이
낙엽처럼 쌓여 있는 곳
우산도 잃어버리고 공책도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잃어버린 물건들에서 점점
멀어지는 순간을 살아갔다.
숲 속은 잃어버린 나무 같은 게 없는 곳인데
푸른 하늘과 검은 우주가
같은 곳인데
조금씩 다른 빗방울들이 떨어져서
나는 새로 산 우산을 펴 들었다.
그것이 잃어버린 우산과 같지 않았다.
빗방울들이 모두 달랐다.
이 비 그치고
지금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밤하늘을 내가 바라보자
거기 어딘가의 별들 가운데
깊은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조용한 의자를 닮은
그런 밤하늘이라고 중얼거렸다.
―이장욱(1968∼)
의자는 참 신기하다. 어느 때는 마음이 되고 어느 때는 시간 혹은 장소가 되고, 마음을 빼앗는 풍경 앞에서는 풍경 자체가 된다. 시인은 밤하늘의 자리를 짚어 “조용한 의자를 닮은” 밤하늘이라 한다. 이때 의자는 “별들 가운데 깊은 자리”, 그 여백만큼의 자리 하나가 된다.
그건 어떤 밤하늘일까? 앉아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드는 의자, 자는 것을 잊은 채 잠에 도착하게 하는 잠, 하늘이란 것을 잊은 채 밤하늘 복판에 도착하게 하는 순간 같은 걸까? 이 시의 아름다움은 하늘과 땅의 거리, 자는 사람과 잠의 관계, 의자와 별들 사이의 층위가 느슨하게 배치되고 자유로이 전복되는 순간에 있다. 의자, 가을, 밤하늘이 악보의 음표처럼 연결돼 있는 세상이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나’는 잃어버린 게 많은데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아닌가? 시를 천천히 다시 읽으면 밤하늘을 닮은 의자에 앉아 의자를 닮은 밤하늘로 이송되는 기분이 든다. 하늘로 이송이라니? 시에서라면 가능하다. 의자에 앉아 있다는 것을 잊는다면, 가장 쉽고 빠른 순간이동이 의자 위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그곳은 잃어버린 것들이 모여 사는 곳일지도 모른다.
[동아일보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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