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 윤영훈
백지는 태초의 말씀이 숨겨져 있다
많은 말보다 침묵의 소중함을
초롱초롱한 아기의 눈빛으로
지그시 전하고 있다
백지는 순결한 처녀이다
보이지 않는 게 더 가치 있음을
수줍게 기다리는 모습이 더 고움을
마알간 얼굴로 보여주고 있다.
(시집 ‘별을 잃어버린 그대에게’, 세인출판, 2016)
[시의 눈]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백지, 그러나 그 백지를 심미안으로 투시하면 거기에 의식의 세계가 묻어있다. 의식의 세계는 동경의 세계요, 이상의 세계다. 시니피에로서의 백지, 거기엔 다양한 스펙트럼의 의미 변주가 숨어있다. 말하지 않음을 말함으로, 공허함을 넉넉한 채움으로, 정적인 공간을 사뭇 동적인 공간으로 변화, 혹은 승화시키는 백지의 마법에는 여백의 그윽한 미가 자리 잡고 있다. 여백의 미는 또 다른 백지의 시학이다. 하이데커가 존재론적 물음을 근본 양식으로 해 세계를 해석해낸 것처럼 가다머는 인문학적 해석의 견지에서 확장된 사물의 해석을 내놓는다. 백지는 단순히 미적 대상이 아니라 진리를 드러내는 인식의 매개물로 떠오른다. 백지의 비움과 자유로움은 인식의 놀이터이다. 놀이터로 끌어들이는 백지의 힘, 그것은 예술미학의 경험에 참여케 함으로써 특별한 진리를 맛보게 하는 추동체 사명을 담당한다. ‘백지는 태초의 말씀이 숨겨져 있다’, ‘백지는 순결한 처녀이다’ 이 철학적 명제는 말이 필요 없다. 침묵을 통해 수없는 말을 되뇌이게 만든다. 침묵을 눈빛으로 읽으며, 시인의 자각을 응시하며, 조용한 언어의 몸짓에 호응하며, 사색의 담금질을 추슬러 가는 것을….
<광주매일신문 윤삼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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