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악보 / 이가림
오늘은 7월14일
불란서 혁명 기념일
그래서 그런지
담장의 장미꽃들이
오선지 위의 붉은 음표처럼
피의 폭죽을
펑, 펑, 터뜨리고 있다
저 불순한 것들이
어정쩡히 살아온 나를
박열朴烈 같은 젊은 아나키스트로
잘 못 본 것일까
오늘 밤만은
장렬한 불꽃 축제에
주저 없이 가담하여
함께
폭죽을 쏘아 올리자고
자꾸만 손짓한다
이가림(1943~2015)
죽은 시인이 오래전 보낸 투병통신이 지금 도착했다. 유리병 속에 담긴 편지를 꺼내 천천히 펼치니 “오늘은 7월14일”이고, “불란서 혁명 기념일”이라고 적혀 있다. 한때 시인의 눈동자에 담겼을 “담장의 장미꽃들”이 “오선지 위의 붉은 음표”처럼 “피의 폭죽”을 “펑, 펑, 터뜨리고” 있다. 시인은 붉은 장미를 보며, 젊은 혁명가 박열을 떠올린다. 한 혁명가의 붉은 사랑을 떠올린다. 그리고 “어정쩡히 살아온” 자신을 돌아본다.
프랑스 혁명의 거대한 파도는 자신의 몸은 죽일 수 있어도 정신만은 죽일 수 없다고 외쳤던 조선 혁명가의 뜨거운 심장에 깃들었고, 마침내 그 푸른 정신은 빛의 혁명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온통 붉은 화염에 델 것 같은 날. “장렬한 불꽃 축제”에 “폭죽을 쏘아 올리자”는 시인의 전언을 읽자, “붉은 악보”가 연주되기 시작한다. 7월14일, 오늘은 푸른 혁명의 날. 또한 시인이 하늘로 돌아간 날. 장미는 더욱 붉고, 가시는 찔려도 좋을 만큼 날카롭게 빛난다.
[경향신문 이설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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