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 서정주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4. 12. 7. 05:44

11월 끝자락에 첫눈이 내렸습니다. 가로등 주변을 헤매는 한밤중의 첫눈이었지요. 쌀알만 한 눈송이들이 밤을 환하게 휘젓는 풍경이 근사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눈을 이고 진 나무들이 하루아침에 백발이 된 사람처럼 서 있더군요. 이 무슨 마술 같은 풍경인가요?

싸락눈 내릴 때마다 혼자 외워보는 시가 있습니다.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이렇게 시작하는 시입니다. 싸락눈, 눈썹/ 내리어, 때리니- 말들이 짝을 이루어 입에 착 감기는 리듬을 만들어내지요. 싸락눈은 화자의 기억을 불러옵니다. 눈썹을 때리는 눈발이 암무당의 손때 묻은 징채를 떠올리게 하는데, 내리는 눈과 때리는 채찍(징채) 사이 오묘한 개연성이 생기지요. 무당의 징과 징채를 들고 가는 이는 아홉 살 먹은 “하인 아이”입니다. 무당이 기르는 개와 함께 “누룽지에 취직”한 처지라니, 아이는 씩씩하게 걸어가고는 있지만 개와 다를 바 없는 미천한 처지일 것입니다. 화자가 시간 강사에 목이 쉬어 “인제는 작파할까” 망설이는 사이, 싸락눈은 마음 깊숙한 곳을 때리고(내리는 눈이 아닌 때리는 눈입니다) 옛날 그 아이, 눈발처럼 날리는 운명이 걱정도 되겠지요.

이상하지요. 이 시를 알게 된 후부터는 싸락눈이 내릴 때마다 징과 징채를 쥐고 걸어가는 아홉 살 아이가 된 기분이 듭니다. ‘에헴’ 젠체하며 어른 흉내도 내보지만 세상에 혈혈단신으로 선 것 같지요. 눈은 그치지 않고, 세상은 가도 가도 벌판이며 나는 아직도 아홉 살이라서, 눈이라도 비벼야 할 것 같은 기분입니다.

 [농민신문 시인 박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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