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가을의 눈 / 김현승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4. 9. 9. 10:22

가을의 눈 / 김현승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눈물에 해당하는…….
산비탈과
먼 집들에 불을 피우시고
가까운 곳에서 나를 배회하게 하소서.
나의 공허를 위하여
오늘은 저 황금빛 열매들마저 그 자리를
떠나게 하소서. (후략)
- 김현승 '가을의 시' 부분

누가 뭐래도 김현승 시인은 가을의 시인이고 대표작 '가을의 기도'가 더 유명하지만 이 시는 더욱 고독한 지하실로 한 걸음 더 내딛는 데가 있다. 넓이와 높이 대신 오직 깊이에 침잠한 시인의 사유가 응축돼서다. 열매가 사라진 자리, 훗날의 공허마저 감지해내는 이 예언적인 시는 '이 계절의 내가 어느 태양을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가을은 눈으로 온다고 했던가. 가을은 '나'를 겸허한 온도로 바꾸기에 좋은 계절, 애상을 넘어 존재의 실상을 관찰하기에 적당한 날씨다.
  [매일경제신문 김유태 문화스포츠부 기자(시인)]

728x90

'글쓰기 공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밤 산책 / 조해주  (0) 2024.09.09
웃음끼리 / 박명숙  (0) 2024.09.09
산그늘 / 이상국  (0) 2024.09.09
병원 / 윤동주  (0) 2024.09.09
<토요 강좌/시의 인문학> 비유의 힘, 직관의 힘  (0) 2024.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