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시 창작 강좌> 제99강
■ 시인과 화자와의 싸움
오늘이 2016년의 마지막 날이고 이 강좌도 99강 이라는 완전 숫자로 올해를 맺게 되었다. 2017년 새해 첫 주 강의는 100강 부터 새롭게 시작하게 되니 감회가 새롭기도 하다.
지난 2년의 세월동안 시 창작에 필요한 실제적 방법에 대해서 나의 지식과 경험, 다른 분들의 시론을 참고하여 매주 토요일 아침 8시에 내가 관여하는 밴드 세 곳에 글을 올렸다. 나의 이 강의는 수준 높은 이론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은 읽을 필요가 없다. 서점에 널려있는 이론서나 인터넷에 떠도는 시 창작 이론을 읽어보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시 공부를 하거나 가르치면서 실제로 부닥친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였던 것 위주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시창작법을 쉽게 풀어서 설명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밴드'라는 공간의 특성상 계속 회원들이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는지라 언급했던 시 창작법을 또 해야 될 때도 있었고 익명성 뒤에 숨어있는 회원들을 상대로 체계적인 강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나는 내가 주업으로 하는 다른 일 때문에 시간에 쫓겨서 강의를 깊이 있게 쓸 수 없을 때가 대부분이었는데 나중에 다시 보면 수준이 낮아서 얼굴이 화끈거릴만한 강의도 꽤 있었다. 오늘에야 여러분의 이해를 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주고 필사로, 댓글로 용기를 주며 격려하여 준 회원들 때문에 오늘까지 이 강좌를 지속할 수 있었다. 우스운 일은 인터넷에 나의 이 강의가 출처도 없이 떠도는 경우도 있고 어떤이는 아예 자기 강의인양 버젓히 자기 이름으로 밴드나 까페에 올려놓은 경우도 몇 건 봤다. 이런 사실을 지인이 발견하곤 흥분하여 나에게 조처를 취하라고 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나의 이 강의는 이익이나 어떤 댓가를 바라고 시작한 것도 아니고 나의 작은 달란트를 조건없이 나누는 봉사의 차원에서 시작했기에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나로서는 오히려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이 강의를 읽고 도움이 된 사람도 있었겠지만 더러는 글 쓰기가 더 어렵게 됐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 창작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자신의 시에 도취되어 혼자 시를 썼을때는 몰랐던 것들을 하나하나 시를 배워갈수록 시 쓰는 일이 쉬운일이 아님을 더욱 절감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시집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나의 권고를 들은 회원들 중에는 여러 종류의 시집을 사서 읽어 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집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오히려 시 쓰기에 절망하게 되었다는 하소연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인들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 도무지 따라 갈 수 없을 것 같은 자기 글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다. 또 어떤이는 자기가 쓰려고 했던 것들은 이미 시인들이 시로 발표하였고 막상 시를 쓸려고 하니 쓸만한 소재가 없어서 낙심하여 시 쓰기를 그만 두고 싶다는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다시 말하거니와 누구나 이런 과정을 거쳐서 시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소재가 똑 같더라도 내가 본 느낌은 다를 수 있다. 시는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거나 지각하지 못한 것을 찾아내어 나의 상상력을 덧입혀 쓰는 일이기에 그렇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시의 소재는 우리 주변에 엄청나게 널려있다. 시는 현상을 대상으로 상상으로 그리는 말 그림인데 사람의 상상하는 바가 똑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나의 시각으로 그림을 그리면 된다. 시 쓰기가 쉽지는 않아서 낙심하는 회원들에게 나는 단언한다. 시에 발을 디딘 사람은 슬럼프에 빠질 수는 있어도 시 쓰기를 절대 그만둘 수 없다. 왜냐하면 시는 마약처럼 중독성이 있기 때문에 시의 맛을 본 사람은 시를 쓸 수 밖에 없는 것이기에 그렇다.
시 쓰기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시는 영혼의 피를 흘려야 하는 고통스런 것이라든지 천형의 고난을 감내할 용기로 시를 써야 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시를 써도록 두고 또한 그들이 쓴 시의 진정성에는 박수를 보내주어야 한다. 그들 중에는 훌륭한 시인도 많다. 그러나 나의 <생명 시 운동>은 우리의 사람살이에 시가 긍정적으로 이바지 하도록 써보자는 것임을 누누히 강조해 왔다, 시를 쓰거나 읽을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 말은 시에서 고통이나 눈물을 멀리 하라는 말이 아니다. 시의 궁극적 목표인 삶의 카타르시스, 담담하되 감동이 베어나오는 시의 열쇠를 찾자는 것이다. 이것은 '서정으로 돌아가자'라는 시 운동과도 연관된다.
시를 배운다는 것은 자신에게 덕지덕지 붙어있던 타성, 익숙한 것들을 하나 하나 떼어내는 작업이다. 시인은 직,간접으로 경험했던 것에 지각과 감수성을 동원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을 해석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시인이 경험했거나 삶의 진정성만으로 시를 쓰겠다는 태도는 곧 시의 소재가 바닥나거나 시 쓰기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는 경험의 진실성을 따지는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시를 쓰려면 체험을 많이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체험에는 직접 체험과 간접 체험, 상상적 체험이 있다. 그러나 시가 직,간접의 체험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시는 직,간접의 체험 이상의 것이다. 오히려 상상적 체험을 묘사하고 진술하는 장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래서 시인은 선험적(先驗的)으로 세상에 먼저 발을 디디는 사람이다. 그래서 시를 쓴 현실의 사람이 시의 주인공이 되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직접 체험했던 것에 갇히게 된다는 사실이다. 자기의 윤리관이나 기치관, 이성이 개입하게 되면 시에 등장하는 화자(話者)의 체험을 확장하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한다. 시의 주인공은 '화자'다. 내가 시를 주도하면 시 속의 화자가 죽거나 숨어버린다. 시 속의 화자가 시를 주도하게 해야 한다. 시를 쓸 때는 철저하게 화자가 주인공이 되어서 줄거리를 끌고 가도록 하라. 화자가 처한 입장에서 생각하고 화자의 정서를 솔직 담백하되 신선하고 내밀하게 표현해야 한다. 시에는 화자(話者)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他者), 또는 사물이 등장한다. 이때 시에 등장하는 대상들과의 관계를 철저한 의미망(意味網)으로 화자와 연결해야 한다. 즉 타자나 사물이 등장하지 않으면 안 될 화자와의 관계 역할이 반드시 주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 화자와 시의 세 가지 축
1. 화자(話者) : 주인공, 말하는 사람
2. 타자(他者) : 다른 사람
3. 객관적 상관물(客觀的 相關物) :
창작자가 표현하려는 자신의 정서나 감정, 사상 등을 다른 사물이나 상황에 빗대어 표현할 때 이를 표현하는 사물이나 사건을 뜻한다. 즉, 개인적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사건을 통해서 객관화 하려는 창작기법이다.
고무밴드 / 신미균
백수 Z는 심심하면 나를 자꾸 잡아당긴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힘을 빼고 길게 길게 늘어났다가
놓으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것이 재미있는지
할 일 없는 Z는
나를 길게 당겨보다가 말다가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어떤 한계에 다다르면
나도 Z의 손에 대책 없이 늘어나는 것이 싫어
나도 나를 잡아당긴다
Z가 나를 당기는 힘과
내가 나를 당기는 힘이 팽팽하게 맞선다
만만하게 보았는데
당겨도 더 이상 늘어나지 않으니까
Z는 오기가 생기나 보다
아까보다 더 세게 당긴다
그래도 더 이상 늘어나지 않으면
죽기 살기로 당긴다
별것도 아닌 일에 힘쓰다 보니
그도 자꾸 헐거워지나 보다
나를 당기는 힘이 예전 같지가 않다
위 시에서 화자는 누구이며 타자는 누구인가? 객관적 상관물을 구분하여 시를 해석 해보고 그 느낌을 댓글로 달아주기 바란다. 두 분 정도 뽑아서 새해 첫 작은 선물을 보내려고 한다.
이어산, <생명 시 운동 51>
■ 시인과 화자와의 싸움
오늘이 2016년의 마지막 날이고 이 강좌도 99강 이라는 완전 숫자로 올해를 맺게 되었다. 2017년 새해 첫 주 강의는 100강 부터 새롭게 시작하게 되니 감회가 새롭기도 하다.
지난 2년의 세월동안 시 창작에 필요한 실제적 방법에 대해서 나의 지식과 경험, 다른 분들의 시론을 참고하여 매주 토요일 아침 8시에 내가 관여하는 밴드 세 곳에 글을 올렸다. 나의 이 강의는 수준 높은 이론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은 읽을 필요가 없다. 서점에 널려있는 이론서나 인터넷에 떠도는 시 창작 이론을 읽어보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시 공부를 하거나 가르치면서 실제로 부닥친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였던 것 위주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방법으로 시창작법을 쉽게 풀어서 설명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밴드'라는 공간의 특성상 계속 회원들이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는지라 언급했던 시 창작법을 또 해야 될 때도 있었고 익명성 뒤에 숨어있는 회원들을 상대로 체계적인 강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나는 내가 주업으로 하는 다른 일 때문에 시간에 쫓겨서 강의를 깊이 있게 쓸 수 없을 때가 대부분이었는데 나중에 다시 보면 수준이 낮아서 얼굴이 화끈거릴만한 강의도 꽤 있었다. 오늘에야 여러분의 이해를 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주고 필사로, 댓글로 용기를 주며 격려하여 준 회원들 때문에 오늘까지 이 강좌를 지속할 수 있었다. 우스운 일은 인터넷에 나의 이 강의가 출처도 없이 떠도는 경우도 있고 어떤이는 아예 자기 강의인양 버젓히 자기 이름으로 밴드나 까페에 올려놓은 경우도 몇 건 봤다. 이런 사실을 지인이 발견하곤 흥분하여 나에게 조처를 취하라고 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나의 이 강의는 이익이나 어떤 댓가를 바라고 시작한 것도 아니고 나의 작은 달란트를 조건없이 나누는 봉사의 차원에서 시작했기에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나로서는 오히려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이 강의를 읽고 도움이 된 사람도 있었겠지만 더러는 글 쓰기가 더 어렵게 됐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 창작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자신의 시에 도취되어 혼자 시를 썼을때는 몰랐던 것들을 하나하나 시를 배워갈수록 시 쓰는 일이 쉬운일이 아님을 더욱 절감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시집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나의 권고를 들은 회원들 중에는 여러 종류의 시집을 사서 읽어 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시집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오히려 시 쓰기에 절망하게 되었다는 하소연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인들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 도무지 따라 갈 수 없을 것 같은 자기 글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다. 또 어떤이는 자기가 쓰려고 했던 것들은 이미 시인들이 시로 발표하였고 막상 시를 쓸려고 하니 쓸만한 소재가 없어서 낙심하여 시 쓰기를 그만 두고 싶다는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다시 말하거니와 누구나 이런 과정을 거쳐서 시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소재가 똑 같더라도 내가 본 느낌은 다를 수 있다. 시는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견하지 못했거나 지각하지 못한 것을 찾아내어 나의 상상력을 덧입혀 쓰는 일이기에 그렇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시의 소재는 우리 주변에 엄청나게 널려있다. 시는 현상을 대상으로 상상으로 그리는 말 그림인데 사람의 상상하는 바가 똑같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나의 시각으로 그림을 그리면 된다. 시 쓰기가 쉽지는 않아서 낙심하는 회원들에게 나는 단언한다. 시에 발을 디딘 사람은 슬럼프에 빠질 수는 있어도 시 쓰기를 절대 그만둘 수 없다. 왜냐하면 시는 마약처럼 중독성이 있기 때문에 시의 맛을 본 사람은 시를 쓸 수 밖에 없는 것이기에 그렇다.
시 쓰기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시는 영혼의 피를 흘려야 하는 고통스런 것이라든지 천형의 고난을 감내할 용기로 시를 써야 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시를 써도록 두고 또한 그들이 쓴 시의 진정성에는 박수를 보내주어야 한다. 그들 중에는 훌륭한 시인도 많다. 그러나 나의 <생명 시 운동>은 우리의 사람살이에 시가 긍정적으로 이바지 하도록 써보자는 것임을 누누히 강조해 왔다, 시를 쓰거나 읽을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 말은 시에서 고통이나 눈물을 멀리 하라는 말이 아니다. 시의 궁극적 목표인 삶의 카타르시스, 담담하되 감동이 베어나오는 시의 열쇠를 찾자는 것이다. 이것은 '서정으로 돌아가자'라는 시 운동과도 연관된다.
시를 배운다는 것은 자신에게 덕지덕지 붙어있던 타성, 익숙한 것들을 하나 하나 떼어내는 작업이다. 시인은 직,간접으로 경험했던 것에 지각과 감수성을 동원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을 해석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시인이 경험했거나 삶의 진정성만으로 시를 쓰겠다는 태도는 곧 시의 소재가 바닥나거나 시 쓰기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는 경험의 진실성을 따지는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시를 쓰려면 체험을 많이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체험에는 직접 체험과 간접 체험, 상상적 체험이 있다. 그러나 시가 직,간접의 체험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시는 직,간접의 체험 이상의 것이다. 오히려 상상적 체험을 묘사하고 진술하는 장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래서 시인은 선험적(先驗的)으로 세상에 먼저 발을 디디는 사람이다. 그래서 시를 쓴 현실의 사람이 시의 주인공이 되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자기가 직접 체험했던 것에 갇히게 된다는 사실이다. 자기의 윤리관이나 기치관, 이성이 개입하게 되면 시에 등장하는 화자(話者)의 체험을 확장하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한다. 시의 주인공은 '화자'다. 내가 시를 주도하면 시 속의 화자가 죽거나 숨어버린다. 시 속의 화자가 시를 주도하게 해야 한다. 시를 쓸 때는 철저하게 화자가 주인공이 되어서 줄거리를 끌고 가도록 하라. 화자가 처한 입장에서 생각하고 화자의 정서를 솔직 담백하되 신선하고 내밀하게 표현해야 한다. 시에는 화자(話者)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他者), 또는 사물이 등장한다. 이때 시에 등장하는 대상들과의 관계를 철저한 의미망(意味網)으로 화자와 연결해야 한다. 즉 타자나 사물이 등장하지 않으면 안 될 화자와의 관계 역할이 반드시 주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 화자와 시의 세 가지 축
1. 화자(話者) : 주인공, 말하는 사람
2. 타자(他者) : 다른 사람
3. 객관적 상관물(客觀的 相關物) :
창작자가 표현하려는 자신의 정서나 감정, 사상 등을 다른 사물이나 상황에 빗대어 표현할 때 이를 표현하는 사물이나 사건을 뜻한다. 즉, 개인적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사건을 통해서 객관화 하려는 창작기법이다.
고무밴드 / 신미균
백수 Z는 심심하면 나를 자꾸 잡아당긴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힘을 빼고 길게 길게 늘어났다가
놓으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것이 재미있는지
할 일 없는 Z는
나를 길게 당겨보다가 말다가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어떤 한계에 다다르면
나도 Z의 손에 대책 없이 늘어나는 것이 싫어
나도 나를 잡아당긴다
Z가 나를 당기는 힘과
내가 나를 당기는 힘이 팽팽하게 맞선다
만만하게 보았는데
당겨도 더 이상 늘어나지 않으니까
Z는 오기가 생기나 보다
아까보다 더 세게 당긴다
그래도 더 이상 늘어나지 않으면
죽기 살기로 당긴다
별것도 아닌 일에 힘쓰다 보니
그도 자꾸 헐거워지나 보다
나를 당기는 힘이 예전 같지가 않다
위 시에서 화자는 누구이며 타자는 누구인가? 객관적 상관물을 구분하여 시를 해석 해보고 그 느낌을 댓글로 달아주기 바란다. 두 분 정도 뽑아서 새해 첫 작은 선물을 보내려고 한다.
이어산, <생명 시 운동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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