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시 창작 강좌> 제98강
■ 감정의 조절과 시의 옷 입히기
시를 쓴다는 것은 목말라 하는 사람(독자)이 내민 컵에 물을 따라서 주는 일과 같다. 그런데 물이 넘치도록 따라 준다면 오히려 결례가 된다. 적당하게 따라주고 한 컵 더 달라고 한다면 다시 따라주면 된다. 소설이나 수필은 쓰고 싶은 말을 다 써도 되지만 시는 쓰고 싶다고 다 쓰면 안된다. 이 말은 산문은 다 말하는 것이지만 시는 써서는 안 될 말을 골라내는 일이라는 것이다. 즉 과잉된 의식을 조절하지 않으면 잔에서 물이 넘치듯 질서없는 문장이 되어서 시를 버리게 된다. 다시 말한다.
''시는 감정의 조절이다''
시를 왜 읽느냐고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시를 읽으면 마음이 아름다와진다''라는 대답이 가장 많다. 이 말은 시를 쓰는 사람의 지향점을 암시해준다. 즉, 시를 읽는 사람이 시로 인하여 마음이 순화되고 아름다운 정서를 갖게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우리 시사모의 <생명 시 운동>의 방향이다.
<생명 시>가 추구하는 방향
1. 적절한 감정의 조절이 있는가?
2. 품위있고 세련된 언어인가?
3. 새로운 얼굴의 언어인가?
4. 때묻지 않은 언어인가?
5. 순화된 높은 차원의 언어인가?
6. 독자로 하여금 마음이 순화되고 아름다운 정서를 갖게 되도록 하는가?
물론 시의 갈래는 다양하고 사람에 따라서 실험적인 시를 써거나 혹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러나 말이 아름다우면 행동이 아름답게 되고 말이 거칠면 행동도 거칠다. 또한 마음이 맑으면 말이 맑게 되고 말이 맑으면 시도 맑아서 독자에게 아름다움을 선물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명 시 운동>을 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시가 메마른 세상에 오아시스 같은 것이 되면 좋지 않겠는가? 무슨 소리인지 이해되지 않는 글, 혼돈을 부추겨서 짜증을 더하게 하는 것도 시의 다양성이나 작품성이 있다는 미명아래 무한정 허용되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이젠 심각하게 생각을 해볼 일이다. 내가 말하는 작품성의 기준은 보통의 시인들이 두세 번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쓰레기통에 집어던져도 된다는 것이다. 시를 쓰는 시인들도 알아먹지 못하는 것을 독자가 이해하라는 것은 독자에 대한 고문이고 시를 전문가들의 전유물로 만들려는 술책에 다름아닐 것이다. 나의 생명시 운동은 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시를 돌려주고 옛날처럼 시가 우리의 삶을 품격있고 풍요로와지고 사람을 살리고 사회에 좋은 공기역할을 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시사모 회원들께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시를 도구로 사용하지 말자는 것이다. 남을 공격하는데 시를 이용하면 그것은 시가 아니라 칼이 된다. 자기의 명예나 축재를 합리화 시킨 것, 허영이나 사치욕구에서 시를 장신구 쯤으로 생각하여 쓴다면 그것은 싸구려 천민문학의 범주에도 들지 못한다. 사회현상에 대한 시도 마찬가지다. 얼마전에 '사회 참여시'에 대해 언급한바 있지만 시인이 시대의 양심으로서 말해야 할 때가 있지만 그럴 때에도 시인의 자세와 품위를 잃지 말자는 것이다. 진정한 농부는 돈이 되든 안 되든 자기가 가꾸는 농산물을 애지 중지한다. 시를 시답게 가꾸는 일은 순수한 농부처럼 시를 애지중지해야 한다. 시가 이념이나 진영논리에 편향되거나 사회 현상에 편승하여 종주먹질을 하는데 사용되면 그것은 시가 아니다. 시는 광부가 광석을 캐내어서 제련하는 것과도 같다. 잡다한 언어에서 가장 순도높은 시어를 추출하는 일이다.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말이나 사상을 그대로 배설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람의 절절한 정서라도 예술 형식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상관물을 차용하여 순화된 가장 적합한 언어의 취사선택을 통한 깊고 넓은 사고의 강물이 흐르게 하는데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륙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들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 앉는다
- 황지우,<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전문
황지우 시인은 1970년대 유신반대 시위에 연루되어 대학 때 강제징집을 당했었고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그 당시의 억압된 사회분위기는 강요된 애국심을 요구했다. 시적 화자는 이런 폭압적 사회상에 대한 회의와 절망도 감정적 반감이 아니라 새떼를 등장시켜 새들처럼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순치시켜 어두운 현실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현실속으로 주저앉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매우 절제된 언어로 그려낸다.
이처럼 암울한 현실을 비판하면서도 두 가지의 흐름을 하나로 통합시켜서 읽을 수록 더욱 강하게 의미가 다가오게 하는 것, 즉 객관적 상관물로 말하는 시가 좋은 시다. 사회 현실을 비판하더라도 이처럼 감정을 억제하고 이미지의 연결을 통한 시대를 조망하고 기록하는 자의식은 종주먹질에 가까운 감정의 배설이나 현장에서 투사가 되는 일보다는 훨씬 울림이 크다. 위대한 혁명이나 변화는 총이나 주먹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펜에서 나왔음을 역사가 증명하고있다. 그리서 펜은 칼보다 힘이 있고 위대하다고 한 것이다.
시는 이와 같이 좁은 공간의 언어에 많은 의미를 담기 위해 이미지를 복합화 하는데 심혈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눈에 띄는대로, 생각 나는대로 쓴다면 시가 아니다. 아무리 절절한 현실이라도 심미적 예술성이 결여되면 넋두리나 분노의 표출이 된다. 어떤 사물을 볼 때 '무엇을 보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보느냐'가 더욱 중요한데 사물 인식을 위한 통찰력과 시어의 조탁 능력이 시인의 성패를 좌우한다.
시라는 말에는 본래 '무엇인가를 최초로 만들어 낸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시가 우리의 예삿말을 나열하거나 누구나 느꼈음직한 흔한 내용은 시의 대상으로 삼으면 시가 실패할 가능성이 더 커진다. 그래서 항상 봐온 사물도 새로운 상상의 날개를 달아야 하고 정서의 옷을 입혀서 새로운 차원으로 탄생시켜야만 한다.
진주 시인 강희근을 찾아가
고봉으로 넘치는 정에 취해
밤새워 부대낀 다음날
선진성에 올라
휴지조각으로 찢기어 흩날리는
역사의 편린을 줍다가
제천이 덕조 용선이랑 모두
졸음으로 다친 몸 쓰러져 버렸는데
사타구니 씻고 있는
저 건너 눈치섬
그 비릿한 요망끼에 흘려
잠은 추자도 쯤으로 밀려 가버리고
발가벗은 벚나무 붉은 기둥에
연서 두어 장 달아 놓고 왔지.
남겨 두고 온 희근이 지금쯤
눈치섬에 건너가 전에 본 일 없는 듯이
몸을 포개고 낄낄거리고 있지나 않는지.
진주의 용
섬을 감아 안고
세상 몰라라 빙빙 돌고 있지나 않은지.
- 문효치, <선진성에 올라> 전문
사천 선진성은 봄 벚꽃이 꽤 유명하다. 많은 사람이 봐 왔던 선진성에 올라 문효치 시인은 강희근 시인을 떠올렸고 선진성에 새로운 상상의 옷을 입혔다. 흔한 사물에도 새로운 옷을 입히는 것이 시가 되게 하는 방법이다.
잘 쓴 시란 다른 작품이 섞일 수 없을 정도로 고유한 변경 불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몇 편의 시나 여러 사람이 쓴 시를 합쳐도 될 것 같은 비슷한 시가 범람하고 있다. 위 문효치 시인의 저 시적 감성을 보라 누가 저 시에다 다른 시를 합칠 수 있겠는가?
- 이어산, <생명 시 운동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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