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시창작 강좌> 제50강
■ 당ᆞ신ᆞ멋ᆞ져 운동
모든 시인이 좋은 시를 쓰고 좋은 시인이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냐마는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일류니 명작이니 하는 것은 결국 선자(選者)의 수준과 사회적 학습의 결과물 내지는 제도적 구성물이다. 그런데 전문가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 또다른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그것의 해석이 쉽지 않을 때 딜레마가 생기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시적 감동이란 것은 이해를 전재로 하는 것인데 소통의 가능성을 차단한 난해함이란 오히려 빈곤과 성취도를 감추기 위한 수단일 수 있다는 혹평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나날살이엔 어떤 시가 더 영향을 미칠까? 나는 글쓴이의 색감이 시의 깊숙한 곳을 물들인 나다운 시, 새로운 말글로 익숙하던 말글을 밀어낸 창의적 서정이 살아있는 시를 쓰자라는 입장이다.
나는 올해를 여는 첫 강좌를 통하여
<생명시 운동>을 주창한바 있다. 그것은 시단의 이해관계와 지연 학연과 같은 문화자본과 문화권력의 틀 속에서 생산, 소비되는 특권층을 위한 글이 아니라 시를 통하여 내 삶이 즐겁고 독자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삶이 뒷받침 하는 살아 있는 글을 써보자는 취지에서였다. 그러면 특권층에게 만족을 주기위한 것이 아닌 보통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시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또 다시 묻게 된다. 도대체 잡으려 해도 잘 잡히지 않는 좋은 시란 어떤 것인가?
세상은 나날이 발전하여야 하고 우리의 삶은 더 나은 쪽으로 올라서야 한다. 시인은 세상의 울음을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라지만 창의적 서정의 짐을 져 날라서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시를 쓰는 자신은 사람다운 사람으로 변화되고 사람으로서의 따뜻함과 믿음을 주는, 웃음과 즐거움과 위안이 되는 시를 써보자는 말이다. 시를 쓰는 일이 천형(天刑)의 고통을 감내하는 일이라면 진정으로 시를 쓰고자 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생명시 운동은 천형의 고통 말고 ●당차게 시를 쓰고 ●신나게 시를 쓰고 ●멋있게 시를 쓰되 ●져주는 겸손함으로 시를 쓰자는 <당ᆞ신ᆞ멋ᆞ져>운동이기도 한 것이다. 시를 가까이 하고 시를 쓰더니 그 사람의 삶이 품격있고 멋진 것으로 변화 되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꾀죄죄한 모습으로 세상이 버린 자식 마냥 자탄하며 자기 연민에 빠져서 죽을 것 같은 인상을 쓰며 살아가는 시를 쓰는 것이 좋은가? 나는 시를 쓰는 일이 우리 삶의 집 창문에 품위있는 커텐을 다는 작업 같은 것이라고 역설한바 있다. 울음을 보듬고 사는 시인은 그것 나름대로 누군가에겐 위안이 될 수 있으므로 그렇게 쓰도록 놔두고 시를 좋아하는 독자이거나 시인으로 살면서 더욱 행복하고 더욱 즐겁게 살며 남에게 긍정적으로 이바지하는 시를 쓰자는 운동이 바로 <생명시 운동>이다
자기 인생을 추구하는 뜨거운 진실조차
없는 시인이라면 어찌 세상에 하고 많은
직업 중에 제일 신산하고 고역이라는
문학을 택했는지 건방진 말이나, 차라리
문학을 내던지는 것이 인생에 유효한
노릇이겠다.
- 김광균, <시단의 두 산맥>(1946)
광복기 시단에 대한 진단이 오늘날까지 유효하지는 않을 수 있다. '시의 진실'이란 사람과 환경, 시대에 따라서 변할 수도 있긴 하다. 곳곳에서 번성하는 시의 갈래 중에서 우월성과 수월성을 고집할만한 터무니도 없지만 시가 사람에게 긍정적으로 이바지 하고 삶의 향취가 묻어나는 감동을 선사한다면 그것 또한 시를 쓰고 좋아하는 보람이 있지 않겠는가? - 이어산
■ 당ᆞ신ᆞ멋ᆞ져 운동
모든 시인이 좋은 시를 쓰고 좋은 시인이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냐마는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일류니 명작이니 하는 것은 결국 선자(選者)의 수준과 사회적 학습의 결과물 내지는 제도적 구성물이다. 그런데 전문가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 또다른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그것의 해석이 쉽지 않을 때 딜레마가 생기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시적 감동이란 것은 이해를 전재로 하는 것인데 소통의 가능성을 차단한 난해함이란 오히려 빈곤과 성취도를 감추기 위한 수단일 수 있다는 혹평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나날살이엔 어떤 시가 더 영향을 미칠까? 나는 글쓴이의 색감이 시의 깊숙한 곳을 물들인 나다운 시, 새로운 말글로 익숙하던 말글을 밀어낸 창의적 서정이 살아있는 시를 쓰자라는 입장이다.
나는 올해를 여는 첫 강좌를 통하여
<생명시 운동>을 주창한바 있다. 그것은 시단의 이해관계와 지연 학연과 같은 문화자본과 문화권력의 틀 속에서 생산, 소비되는 특권층을 위한 글이 아니라 시를 통하여 내 삶이 즐겁고 독자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삶이 뒷받침 하는 살아 있는 글을 써보자는 취지에서였다. 그러면 특권층에게 만족을 주기위한 것이 아닌 보통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시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또 다시 묻게 된다. 도대체 잡으려 해도 잘 잡히지 않는 좋은 시란 어떤 것인가?
세상은 나날이 발전하여야 하고 우리의 삶은 더 나은 쪽으로 올라서야 한다. 시인은 세상의 울음을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라지만 창의적 서정의 짐을 져 날라서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시를 쓰는 자신은 사람다운 사람으로 변화되고 사람으로서의 따뜻함과 믿음을 주는, 웃음과 즐거움과 위안이 되는 시를 써보자는 말이다. 시를 쓰는 일이 천형(天刑)의 고통을 감내하는 일이라면 진정으로 시를 쓰고자 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생명시 운동은 천형의 고통 말고 ●당차게 시를 쓰고 ●신나게 시를 쓰고 ●멋있게 시를 쓰되 ●져주는 겸손함으로 시를 쓰자는 <당ᆞ신ᆞ멋ᆞ져>운동이기도 한 것이다. 시를 가까이 하고 시를 쓰더니 그 사람의 삶이 품격있고 멋진 것으로 변화 되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꾀죄죄한 모습으로 세상이 버린 자식 마냥 자탄하며 자기 연민에 빠져서 죽을 것 같은 인상을 쓰며 살아가는 시를 쓰는 것이 좋은가? 나는 시를 쓰는 일이 우리 삶의 집 창문에 품위있는 커텐을 다는 작업 같은 것이라고 역설한바 있다. 울음을 보듬고 사는 시인은 그것 나름대로 누군가에겐 위안이 될 수 있으므로 그렇게 쓰도록 놔두고 시를 좋아하는 독자이거나 시인으로 살면서 더욱 행복하고 더욱 즐겁게 살며 남에게 긍정적으로 이바지하는 시를 쓰자는 운동이 바로 <생명시 운동>이다
자기 인생을 추구하는 뜨거운 진실조차
없는 시인이라면 어찌 세상에 하고 많은
직업 중에 제일 신산하고 고역이라는
문학을 택했는지 건방진 말이나, 차라리
문학을 내던지는 것이 인생에 유효한
노릇이겠다.
- 김광균, <시단의 두 산맥>(1946)
광복기 시단에 대한 진단이 오늘날까지 유효하지는 않을 수 있다. '시의 진실'이란 사람과 환경, 시대에 따라서 변할 수도 있긴 하다. 곳곳에서 번성하는 시의 갈래 중에서 우월성과 수월성을 고집할만한 터무니도 없지만 시가 사람에게 긍정적으로 이바지 하고 삶의 향취가 묻어나는 감동을 선사한다면 그것 또한 시를 쓰고 좋아하는 보람이 있지 않겠는가? - 이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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