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요 예술디카시 & 시 공부
오늘은 조삼현 시인의 디카시와 김은미 시인의 시를 텍스트로 감상하겠습니다.
※ 말미에 링크한 내용은 '데일리 경남'에 연재하는 '예술디카시 산책 (제13편)'입니다. 우리 밴드에 실렸던 내용을 재 수록한 것입니다만, 클릭하셔서 댓글도 달아주시면 신문사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함구(緘口)
오늘은 조삼현 시인의 디카시와 김은미 시인의 시를 텍스트로 감상하겠습니다.
※ 말미에 링크한 내용은 '데일리 경남'에 연재하는 '예술디카시 산책 (제13편)'입니다. 우리 밴드에 실렸던 내용을 재 수록한 것입니다만, 클릭하셔서 댓글도 달아주시면 신문사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함구(緘口)
차떼기 스피커는
목청껏 '벌교'라고 외친다
삐죽거린 입,
절대 말하지 않는다
_ 조삼현
“벌교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말고 돈 자랑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꼬막의 주 생산지여서 강아지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부자들이 많은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바다 뻘밭에서 채취한 꼬막 중에서도 벌교 꼬막은 단연 최고로 쳐준다. 그 명성 때문에 벌교 꼬막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은 전국에 수도 없이 생겨났다. 꼬막회, 꼬막찜, 꼬막 볶음, 꼬막 비빔밥 등 여러 가지를 맛볼 수 있는 꼬막 정찬을 시키면 그야말로 남도의 진 맛을 느낄 수 있어서 나는 제철 꼬막을 먹기 위해 가끔 순천이나 여수를 찾아가곤 했다. 꼬막은 11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 생산된 것이 제일 맛있다. 몇 년 전 제주에서 유명 꼬막 맛집을 운영하는 지인이 살짝 귀띔해 주기로 ‘벌교 꼬막’ 맛집이라는 음식점 대다수가 사실 꼬막은 벌교산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벌교에서 잡히는 꼬막의 양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벌교 읍내에 즐비한 식당에 공급하기에도 빠듯할 정도여서 벌교를 벗어난 지역에서는 벌교산을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벌교산이라고 먹었던 그 꼬막은 가짜였단 말인가? 그러나 사실 벌교가 포함된 여자만(汝自灣/여수시, 고흥군, 보성군, 순천시 지역에 걸쳐 위치한 만) 일대의 뻘밭에서 생산되는 꼬막 맛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입산 꼬막도 전문가가 아니면 분간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그러니 벌교산이라고 생각하고 맛있게 먹으면 된다는 말이었다.
오늘 조삼현 시인의「함구」는 그 지역 사람들은 위의 내용을 알고는 있지만, 벌교산인지 아닌지에 관한 진실은 “절대 말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약간 익살스러운 듯하면서도 “그게 그것이니 맛있게 드시면 된다”라는 함의인 듯하다. 그러면서 이 디카시는 거짓말의 효용성에 관해 생각해보게 한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은 “거짓이 판치는 시대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곧 혁명이다.”라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거대한 거짓의 시장이 형성되어서 온갖 달콤한 환상과 치명적인 기만으로 가득 찬 짙은 안갯 속을 끝없이 헤매는 것과도 같다고 이미 1945년에 예언했으니 그는 분명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그의 작품 『동물농장』은 단순한 소설이 아니다. 권력이나 기득권층에 대한 경고문이며 인간의 도리를 묻는 거대한 알레고리다.
조삼현 시인이 벌교 꼬막을 가져와서 던지는 화두 역시 동물농장이 함의하는 내용과 근원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마이클 코넬리(Michael Connelly)가 쓴 『탄환의 심판』이란 소설에서는 마치 거짓말 경연장처럼 변해버린 법정의 현실을 이렇게 비판하고 있는데,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경찰도 거짓말을 하고, 변호사도 거짓말을 하고, 증인도 거짓말을 하고, 피해자도 거짓말을 한다. 재판은 거짓말 경연장이다. 법정 안의 모든 사람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판사도 알고, 심지어 배심원도 안다.”라고 했다. 진실을 증언하겠다고 맹세하는 법정에서조차 상황이 이와 같을진 데,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일상에서 진실을 기대하기는 훨씬 더 어렵다. 인류가 ‘아담’의 거짓말로 멸망했듯 거짓이 세상을 뒤덮으면 세상은 멸망의 길로 가는 것과 같다. 저 작은 꼬막이 벌교산이든 수입산이든 먹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다. 그렇지만 그런 것 하나하나가 모여서 사회의 공기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 거짓을 알면서도 묵인하는 사회 분위기가 일상화된다면『동물농장』의 동물들처럼 언어 권력에 무너질 수밖에 없게 된다. 시인의 시대의 양심이 되어야 하고 증언자가 되어야 한다. 시인은 작은 거짓이나 양심에 어긋나는 일도 참회록처럼 기록하는 사람이다. 시 속의 화자(話者)라는 나를 통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나에게 보여주는 거울이기에 그렇다. 요즘처럼 큰 스피커가 이기는 세상은 정상이 아니다. 비록 작은 목소리라도 진실이 이기는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이다. 거짓에 순응하면 나도, 사회도 거짓의 종이 되어 거짓 인생을 살게 된다.
늑대와 시
김은미
신호등 앞에서 핸드폰 열중하고 있는
나를 노려보고 있을지 모른다
음식 쓰레기통 위 돌멩이를 밀어내고
남긴 고기 덩어리 찾아 쪼아 먹던 비둘기 대신
탈출을 감행한 동물원 늑대
울타리 옆 벚꽃잎도 공범이지
대나무 꽃이 피어 숲이 울상을 짓고 있을 때
돌아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보호자로 자처했을 때
나는 없어도 좋다고 생각한 적 있지
이빨이 퇴화할수록
소멸될 수도 있지만
이미 늑대가 우글거리는 세상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김은미 시인은, 얼마 전 대전의 ‘오월드’라는 동물원을 탈출한 늑대를 잡기 위해 한바탕 소동이 일었던 사건을 모티프로 이 시를 썼다. 「늑대와 시」는, 나를 지켜보는 수많은 늑대 속에서 자아를 찾기 위한 여정이다. "음식 쓰레기통 위 돌멩이를 밀어내고/ 남긴 고기 덩어리 찾아 쪼아 먹던 비둘기 대신/ 탈출을 감행한 동물원 늑대" 자유롭게 하늘을 날던 비둘기는 이제 '닭둘기'라는 소리를 들을만큼 퇴화되어 사람 주위를 맴도는데 늑대만이라도 산속에서 맘껏 뛰놀던 본래의 야성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글 같지만 사실은 시인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가축도 아니고 맹수도 아닌 어쩡쩡한 동물이 된 늑대가 “핸드폰 열중하고 있는/ 나를 노려보고 있을지 모른다”라고 함으로써 원관념인 ‘나’를 보조관념‘늑대’와 환유(metonymy/두 대상의 인접성에 근거한 비유)로 분위기를 환기한 후 강력한 메타포(metaphor/간접적이며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말)인 “당신이 보호자로 자처했을 때/ 나는 없어도 좋다고 생각한 적 있지/ 이빨이 퇴화할수록/ 소멸될 수도 있지만/ 이미 늑대가 우글거리는 세상/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라고 한다. 약육강식이 일어나는 세상과 자유를 속박당한 채 가축화되어 가는 ‘늑대’의 이중성을 통하여 “나는 그 늑대와 무엇이 다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 늑대가 우리를 탈출하는 과정에는 “울타리 옆 벚꽃잎”이 공범이 되었고, “대나무 꽃이 피어 숲이 울상을 짓고 있을 때” 100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는 죽는다는 ‘대나무’가 동원된다. 이 두 개의 개념은 야성을 잃어가는 늑대의 처지와도 같은 화자를 대비하여 시 쓰기의 치열함이 사라져 가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며, 지구의 한 편이 무너져가도 무덤덤한 자아(自我)의 환기를 통하여 세상의 희로애락을 제대로 표현하는 시를 써 보고 싶은 시인의 열정을 되찾기 위한 환유다.
자유를 찾아 탈출한 늑대를 나흘만에 생포하여 다시 동물원으로 돌려보내졌다. 자유를 꿈꾸었으나 그 세상은 살아가기 더 힘든 현실임을 이번 소동이 보여 준 것 같다. 결국 동물원 주위를 배회하다가 사람의 손에 생포되고야 만 늑대의 운명, 그런 늑대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에서 참 늑대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그러나 시인이여, 시인은 작은 골방에서도 세상을 주유(周遊)하는 자유로운 사람이고, 시인의 인생은 문제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신나게 사는 일이므로 내가 지금 갇혀 있다는 자각을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야성을 잃어가는 조그마한 우리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그 자유, 물리적인 자유 위의 정신적인 자유의 쟁취를 위해 시를 쓰는 사람이다.
글_이어산(시인, 한국디카시학회 회장)
목청껏 '벌교'라고 외친다
삐죽거린 입,
절대 말하지 않는다
_ 조삼현
“벌교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말고 돈 자랑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꼬막의 주 생산지여서 강아지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부자들이 많은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바다 뻘밭에서 채취한 꼬막 중에서도 벌교 꼬막은 단연 최고로 쳐준다. 그 명성 때문에 벌교 꼬막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은 전국에 수도 없이 생겨났다. 꼬막회, 꼬막찜, 꼬막 볶음, 꼬막 비빔밥 등 여러 가지를 맛볼 수 있는 꼬막 정찬을 시키면 그야말로 남도의 진 맛을 느낄 수 있어서 나는 제철 꼬막을 먹기 위해 가끔 순천이나 여수를 찾아가곤 했다. 꼬막은 11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 생산된 것이 제일 맛있다. 몇 년 전 제주에서 유명 꼬막 맛집을 운영하는 지인이 살짝 귀띔해 주기로 ‘벌교 꼬막’ 맛집이라는 음식점 대다수가 사실 꼬막은 벌교산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벌교에서 잡히는 꼬막의 양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벌교 읍내에 즐비한 식당에 공급하기에도 빠듯할 정도여서 벌교를 벗어난 지역에서는 벌교산을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벌교산이라고 먹었던 그 꼬막은 가짜였단 말인가? 그러나 사실 벌교가 포함된 여자만(汝自灣/여수시, 고흥군, 보성군, 순천시 지역에 걸쳐 위치한 만) 일대의 뻘밭에서 생산되는 꼬막 맛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입산 꼬막도 전문가가 아니면 분간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그러니 벌교산이라고 생각하고 맛있게 먹으면 된다는 말이었다.
오늘 조삼현 시인의「함구」는 그 지역 사람들은 위의 내용을 알고는 있지만, 벌교산인지 아닌지에 관한 진실은 “절대 말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약간 익살스러운 듯하면서도 “그게 그것이니 맛있게 드시면 된다”라는 함의인 듯하다. 그러면서 이 디카시는 거짓말의 효용성에 관해 생각해보게 한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은 “거짓이 판치는 시대에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곧 혁명이다.”라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거대한 거짓의 시장이 형성되어서 온갖 달콤한 환상과 치명적인 기만으로 가득 찬 짙은 안갯 속을 끝없이 헤매는 것과도 같다고 이미 1945년에 예언했으니 그는 분명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그의 작품 『동물농장』은 단순한 소설이 아니다. 권력이나 기득권층에 대한 경고문이며 인간의 도리를 묻는 거대한 알레고리다.
조삼현 시인이 벌교 꼬막을 가져와서 던지는 화두 역시 동물농장이 함의하는 내용과 근원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마이클 코넬리(Michael Connelly)가 쓴 『탄환의 심판』이란 소설에서는 마치 거짓말 경연장처럼 변해버린 법정의 현실을 이렇게 비판하고 있는데,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경찰도 거짓말을 하고, 변호사도 거짓말을 하고, 증인도 거짓말을 하고, 피해자도 거짓말을 한다. 재판은 거짓말 경연장이다. 법정 안의 모든 사람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판사도 알고, 심지어 배심원도 안다.”라고 했다. 진실을 증언하겠다고 맹세하는 법정에서조차 상황이 이와 같을진 데,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일상에서 진실을 기대하기는 훨씬 더 어렵다. 인류가 ‘아담’의 거짓말로 멸망했듯 거짓이 세상을 뒤덮으면 세상은 멸망의 길로 가는 것과 같다. 저 작은 꼬막이 벌교산이든 수입산이든 먹는 데에는 별 지장이 없다. 그렇지만 그런 것 하나하나가 모여서 사회의 공기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 거짓을 알면서도 묵인하는 사회 분위기가 일상화된다면『동물농장』의 동물들처럼 언어 권력에 무너질 수밖에 없게 된다. 시인의 시대의 양심이 되어야 하고 증언자가 되어야 한다. 시인은 작은 거짓이나 양심에 어긋나는 일도 참회록처럼 기록하는 사람이다. 시 속의 화자(話者)라는 나를 통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나에게 보여주는 거울이기에 그렇다. 요즘처럼 큰 스피커가 이기는 세상은 정상이 아니다. 비록 작은 목소리라도 진실이 이기는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이다. 거짓에 순응하면 나도, 사회도 거짓의 종이 되어 거짓 인생을 살게 된다.
늑대와 시
김은미
신호등 앞에서 핸드폰 열중하고 있는
나를 노려보고 있을지 모른다
음식 쓰레기통 위 돌멩이를 밀어내고
남긴 고기 덩어리 찾아 쪼아 먹던 비둘기 대신
탈출을 감행한 동물원 늑대
울타리 옆 벚꽃잎도 공범이지
대나무 꽃이 피어 숲이 울상을 짓고 있을 때
돌아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보호자로 자처했을 때
나는 없어도 좋다고 생각한 적 있지
이빨이 퇴화할수록
소멸될 수도 있지만
이미 늑대가 우글거리는 세상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김은미 시인은, 얼마 전 대전의 ‘오월드’라는 동물원을 탈출한 늑대를 잡기 위해 한바탕 소동이 일었던 사건을 모티프로 이 시를 썼다. 「늑대와 시」는, 나를 지켜보는 수많은 늑대 속에서 자아를 찾기 위한 여정이다. "음식 쓰레기통 위 돌멩이를 밀어내고/ 남긴 고기 덩어리 찾아 쪼아 먹던 비둘기 대신/ 탈출을 감행한 동물원 늑대" 자유롭게 하늘을 날던 비둘기는 이제 '닭둘기'라는 소리를 들을만큼 퇴화되어 사람 주위를 맴도는데 늑대만이라도 산속에서 맘껏 뛰놀던 본래의 야성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글 같지만 사실은 시인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가축도 아니고 맹수도 아닌 어쩡쩡한 동물이 된 늑대가 “핸드폰 열중하고 있는/ 나를 노려보고 있을지 모른다”라고 함으로써 원관념인 ‘나’를 보조관념‘늑대’와 환유(metonymy/두 대상의 인접성에 근거한 비유)로 분위기를 환기한 후 강력한 메타포(metaphor/간접적이며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말)인 “당신이 보호자로 자처했을 때/ 나는 없어도 좋다고 생각한 적 있지/ 이빨이 퇴화할수록/ 소멸될 수도 있지만/ 이미 늑대가 우글거리는 세상/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라고 한다. 약육강식이 일어나는 세상과 자유를 속박당한 채 가축화되어 가는 ‘늑대’의 이중성을 통하여 “나는 그 늑대와 무엇이 다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 늑대가 우리를 탈출하는 과정에는 “울타리 옆 벚꽃잎”이 공범이 되었고, “대나무 꽃이 피어 숲이 울상을 짓고 있을 때” 100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는 죽는다는 ‘대나무’가 동원된다. 이 두 개의 개념은 야성을 잃어가는 늑대의 처지와도 같은 화자를 대비하여 시 쓰기의 치열함이 사라져 가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며, 지구의 한 편이 무너져가도 무덤덤한 자아(自我)의 환기를 통하여 세상의 희로애락을 제대로 표현하는 시를 써 보고 싶은 시인의 열정을 되찾기 위한 환유다.
자유를 찾아 탈출한 늑대를 나흘만에 생포하여 다시 동물원으로 돌려보내졌다. 자유를 꿈꾸었으나 그 세상은 살아가기 더 힘든 현실임을 이번 소동이 보여 준 것 같다. 결국 동물원 주위를 배회하다가 사람의 손에 생포되고야 만 늑대의 운명, 그런 늑대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에서 참 늑대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그러나 시인이여, 시인은 작은 골방에서도 세상을 주유(周遊)하는 자유로운 사람이고, 시인의 인생은 문제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신나게 사는 일이므로 내가 지금 갇혀 있다는 자각을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야성을 잃어가는 조그마한 우리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인은 그 자유, 물리적인 자유 위의 정신적인 자유의 쟁취를 위해 시를 쓰는 사람이다.
글_이어산(시인, 한국디카시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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