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생존 / 허영선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6. 3. 30. 06:10

생존 / 허영선

 

촛불 하나 켜 놓는다는 것묘비명에 꽃 한 송이 꽂는다는 것

어둠의 집을 허물고

분홍의 소리들로 가득찬 집을 짓는다는 것

방비 없이 당해버린 말과 소에

초원의 풀밭을 준다는 것

어긋나게 죽은 사랑들을 사랑하게 하는 것

헛으로 지은 슬픈 한줌의 빈 묘를 짓는다는 것

춥고 배고팠으니

묘연한 산 사람들을 위한 밥을 지어주자는 것

-허영선(1957~)

 

제주 4·3 사건이 일어난 지 올해로 78주년을 맞았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행방불명되었다. 허영선 시인이 4·3 당시의 일을 기록한 시집을 최근 펴내서 요 며칠 읽었다. “천둥의 밤을 건너온 사람들”의 증언을 담은 시집이었다. 특히 비참한 그날을 건너온 아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함께 담았는데, 일례로 조천읍 북촌의, 4·3으로 부모를 잃은 “10살 미만 상주들”인 아이들이 곡(哭)하는 소리를 내라고 하니 “아이고 아이고”하는 곡을 몰라서, “곡곡”했다는 이야기는 당시의 끔찍한 상황을 실감하게 한다.

이 시는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추모와 진혼의 일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 일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묘비에 꽃을 바치고, 이루진 못한 사랑이 이루어지길 빌고, 쌀을 씻어 흰 밥을 고이 지어서 올리는 일 등이다. 제주의 한 시인은 제주의 “사월은 가난보다 맵”다고 썼다. 사람의 존엄과 세계의 평화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조선일보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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