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와 여백 / 고형렬
모든 아파트는 마당이 없다
새도 날아오지 않고 바람도 불어오지 않는다
모든 아파트는 발코니가 있다
그 발코니는 먼 고향을 내다보는 것 같다
발코니를 막아놓은 까마득한 미끄러움
유리창 드르륵 오른쪽으로 열린다
약시 같은 유리창은 북쪽 하늘의 빛을 닮았다 (후략)
- 고형렬 '이 도시의 모든 아파트는' 부분
마당이 없다는 건 마당만 없다는 게 아니다. 흙과 새와 바람과 목소리가 없다는 의미다. 안쪽이면서 바깥이고, 바깥이면서 안쪽인 발코니는 부재를 감각하게 하는 삶의 여백이 된다. 하지만 그곳에서 시인은 고립되지 않고 먼 곳을 조망한다. 도착하지 않는 자연을, 당도하지 못한 그리움을 호출하는 전망대가 시인의 발코니다. 하늘의 빛을 호출하는 곳, 만질 수도 가닿을 수도 없어도 빛을 받아들이는 자세의 시간이 있다. 늦은 오후 창밖에서 읽어야 하는 시다.
[매일경제신문 김유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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