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열다섯 / 최지은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5. 10. 17. 12:54

열다섯 / 최지은

 

그해 전학 간 그 마을

 

조퇴한 오후

혼자 집에 있을 때면

 

뒷산에서 들려오던 개 돼지 닭 염소를 잡는 소리

그때 나는 사과를 씹으면서

 

식물은 망가질 때 가장 식물다운 소리를 냈다

 

또 한번 사과를 씹으면서

 

사람이 망가질 땐 어떤 소리를 낼까

시를 썼다

 

첫번째 고백은 새엄마가 책갈피 속에 숨겨둔 자목련 꽃잎을 조금씩 찢어버린 일

그걸 망가뜨리려고 책장 앞에서 놀다가 읽다가

찢고 덮고 다시 찢고 덮고

오래 하기 위해 조금씩만 했던 일

 

사과를 씹으면서

 

집은 더 조용해지고

이제 거의 투명해져서

 

다시 사과를 씹으면서

 

소리 없는 오후

 

내가 사라진 것 같은 오후

 

너무 조용해

무엇이든 다 들켜버릴 것만 같았다

 

시를 썼다

[최지은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 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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