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 / 고찬규
밤새,
초승달과 풀잎은
날을 겨누고 있었다
서늘한
풀벌레 울음 속에
한바탕
초승달이 쓸고 지나간
새벽 풀밭
쪼그리고
다초점 렌즈 안경도 벗고
가까이 더 가까이
고개 숙여 다가가는 내게
휜 풀잎
이슬 털며 날을 세운다
아무도 베이지 않았다
-고찬규(1969~)
백로(白露)는 흰 이슬이라는 뜻이다. 백로 즈음이면 풀잎에 이슬이 내린다. 절기가 한로(寒露) 즈음에 이르면 찬 이슬이 맺힌다. 계절은 이제 백로 지나 한로를 향해 가고 있다. 어느덧 석류가 붉게 익고 밤송이가 네 갈래로 벌어져 밤알이 떨어지니 가을 추수의 시기가 되었다.
시인은 초승달이 밤하늘에 떠가고 풀잎에 새벽이슬이 내린 것을 본다. 초승달은 그 흰빛이 마치 낫의 날과도 같아 보여서 풀밭에 달빛이 내릴 때에는 풀밭을 베는 것 같고, 풀잎 또한 휘우듬하고 그 끝이 점차 가늘어져서 마치 날이 선 것만 같다. 하지만, 이 두 날은 무언가를 베어 자르지 않는다. 휘어져 있는 풀잎이 맑고 깨끗한 이슬을 털어내어도 이슬방울을 가르거나 깨지 않는다. 녹색 자연의 성품에는 누군가를 해치려는 마음이 없다.
시인은 시 ‘꽃은 피어서 말하고’에서 “꽃은 피어서 말하고 잎은 지면서 말한다/ 나는/ 너무 많은 말을 해 왔다”라고 노래했는데, “다초점 렌즈 안경을 벗고” 바라보면 자연으로부터 배울 게 많다.
[조선일보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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