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에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 그리고 예술과 정서의 아름다운 교차를 담아낸 시예요.
마치 한 폭의 몽환적인 회화처럼, 따뜻하고 신비로운 이미지가 눈처럼 사뿐히 쌓이는 작품이죠.
시 감상과 해석
1.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 시의 첫 줄에서부터 비현실적인 상상이 펼쳐집니다.
- 삼월은 우리에게 봄의 시작, 새로운 생명의 시간인데, 그 시점에 ‘눈이 온다’는 건 계절의 역전이자 정서의 반전이에요.
- ‘샤갈’은 프랑스의 화가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을 말하죠.
→ 샤갈의 그림은 환상적이고, 동화 같은 마을 풍경과 사랑, 꿈, 종교적 정서가 특징인데, 이 시는 그런 샤갈의 그림 세계를 시로 옮겨놓은 듯합니다.
2.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 봄을 기다리는 사람.
겨울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삼월의 눈이라는 뜻밖의 역행을 맞이하면서, 그는 희망과 불안, 기다림과 조급함이 뒤섞인 상태에 있어요. - ‘정맥이 바르르 떤다’는 표현은 그 불안정한 감정의 육체적 표출이죠. 너무 미세하지만 결정적인 움직임.
3.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 하늘에서 내려와…”
- 눈이 날개를 달고 있다는 표현은 굉장히 시적이고 환상적입니다.
- 이 눈은 단순한 날씨 현상이 아니라, 마치 천사처럼, 혹은 예술의 정령처럼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을 감싸요.
- 그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는 건 일상 속에 신비가 스며드는 순간입니다.
4.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 ‘쥐똥만한 열매’라는 소박하고 구체적인 표현과, ‘올리브빛’이라는 은유적이고 이국적인 색채의 대비가 인상적이죠.
- 시인은 아주 작고 하찮은 존재들조차도, 샤갈의 마을에선 아름답게 변화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 ‘다시 물이 든다’는 건 재생, 생명의 흐름, 혹은 예술이 부여하는 생기와 의미를 상징합니다.
5.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 아궁이에 지핀다”
- 이 마지막 연은 너무 따뜻해요.
눈 내리는 밤, 아낙들이 지피는 불 — 그 불은 현실의 온기, 혹은 사랑과 생의 불씨를 의미해요.
단순히 불을 지핀다는 것을 넘어, ‘제일 아름다운 불’이라 말한 데서, 이것이 예술적 순간, 정서적 절정이라는 걸 암시합니다
사갈의 세계와 시의 세계
샤갈의 그림처럼, 이 시 역시 현실의 틈에 살짝 스며든 꿈이에요.
삼월의 눈이라는 상상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지우고, 독자로 하여금 마치 그림 속을 거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죠.
이용악의 시에서 볼 수 있었던 북쪽의 슬픔,
김춘수의 이 시에선 서정과 색채의 정서적 환상으로 전환됩니다.
마무리 감상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현실 너머의 어떤 고요한 아름다움,
혹은 우리가 잠시나마 머물고 싶은 감성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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