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방

적막한 날 / 박남식

귀촌일기 박뫼사랑 2024. 10. 21. 13:10

적막한 날 / 박남식

 

귓바퀴 마주 접어 세상 소리 틀어막고
온 삶의 군더더기 한순간에 걷어 낸다
내 안의 우렛소리 들으며 적막함도 밀어낸다
(시조집 ‘시인과 반야로차를 마시다’, 책만드는집, 2024)

[시의 눈]
눈을 드니 산빛에 이마마저 차갑습니다. 투명한 산의 오후란 늘 고즈넉한 품을 열곤 하지요. 쿠빌라이 칸이 숲의 제국에나 든 것처럼 난 정복자의 부릅뜬 눈을 부러 지어봅니다. 이탈로 칼비노가 ‘보이지 않는 도시’ 근교의 숲에서 사라진 고대사를 연역해 냈다지만 난 족탈불급이지요. 그래, 초라하기 짝 없는 흰 눈썹이나마 치켜올릴 수밖에요. 딴엔 위풍당당하다 여기는 자만심도 함께하지요. 산 아래 마을들이 내 호령을 받는 듯한 착각에도 빠집니다. 옛 성곽은 무너진 지 오래고 번화한 왕궁이 멀리 연무 속에 사라집니다. 문득 산은 후두둑 잎을 떨구며 바람의 회초리를 맞습니다. 한 철 보듬고 있다가 이즘에 놓아주는 상수리 열매들, 가시방울 비집고 나온 알밤이 내 주머니에 담기기도 합니다. 억새꽃 솜털이나 산싸리 씨앗이 몰래 붙어 옮겨와 털어주기를 기다립니다. 칸 쿠빌라이가 산 넓이로 풍년을 계산했듯, 열매 주우며 옮긴 내 걸음 이만하면 족하다 산이 일러줍니다. 하지만 난 깨달은바, 주머니 넣었던 밤알을 탈탈 반납합니다. 아, 빼앗지 말아야 할 건 산의 양식만이 아니더군요. 그걸 기어코 주우려고 ‘여깄다!’ 소리치며 짙푸른 적막을 깨뜨린 죄가 더 클 것도 같습니다. 가는 길, 옷도둑 풀씨나, 아니면 저절로 들어온 도토리알을 털어내는 일만이 능사는 아니군요. 산의 숨소리를 산산 깨버린 난 ‘미안해 미안해’를 남깁니다. 박남식 시인은 창원 출생으로 2005년 ‘시조세계’로 등단했고, 시조집 ‘길잡이의 노래’(2016)를 펴냈습니다. 그는 한재 이목의 사상을 연구한바, 차도와 시조를 융합하여 쓰는 향기 단아한 서정시인입니다.

<광주매일신문 노창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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